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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보관함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탕건‚ 족두리‚ 장신구 등을 보관하던 종이공예 보관함.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김성규 유품으로 탕건‚ 족두리‚ 장신구 등을 보관하던 종이공예 보관함이다. 종이함은 주로 지도기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종이를 여러 번 겹쳐 발라 후지(厚紙)를 만들어 기형(器形)을 완성하는 방법과‚ 대나무 또는 나무로 골격이나 기형을 만든 다음 그 안팎에 종이를 두세 겹 바르는 목골지장(木骨紙粧)의 두 가지 기법이 있다. 후지기(厚紙器)는 대체로 하중(荷重)을 받지 않는 소형 기물인 쌈지‚ 합‚ 반짇고리‚ 빗접 등에 많이 이용되었고‚ 목골지장은 장‚ 농‚ 함 등의 대형 수장구(收藏具)에 주로 이용되었다. 목골지장은 서민층에서는 값싼 나무로 목골을 만들어 그 안팎 면을 휴지로 여러 겹 싸서 바르고 표면을 색지로 마감하며‚ 부유층에서는 결이 좋은 목재로 골격을 만들고 이 골격을 노출시켜 소지나 당지(唐紙)를 바른 호사스런 별격(別格) 취미의 기물로 애용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염료로 물들인 청(靑)‚ 적(赤)‚ 홍(紅)‚ 황(黃)‚ 녹(綠)‚ 자색(紫色) 등의 바탕색에 맞추어 나비나 박쥐‚ 원앙‚ 쌍희[囍]‚ 만(卍) 등의 길상문(吉祥文)을 오려 붙였다 <세부사항> *종이공예 종이공예는 종이를 이용하여 기물을 만들거나 장식하는 기예 및 그 제품의 총칭으로 지공예라 하기도 하고 장(藏)‚ 농(籠)‚ 함(函)‚ 연상(硯床)‚ 필통‚ 등촉기구(燈燭器具)‚ 방장(房帳)‚ 자리‚ 방석‚ 반짇고리‚ 빗접‚ 빗접고비‚ 소반‚ 합(盒)‚ 함지‚ 항아리‚ 식지(食紙) 등 가정용 비품과 쌈지‚ 안경집‚ 표주박‚ 화살통‚ 자라병옷‚ 부채‚ 우산 등의 휴대용품‚ 그리고 지의(紙衣‚ 油衫)‚ 신‚ 갓모 등의 복식류‚ 지화(紙花)‚ 지등(紙燈)‚ 연(鳶) 등과 같은 연희나 의례용품에 이르기까지 일상 생활용품 전반에 고루 이용되었다. 종이공예의 재료는 닥종이로서 글씨를 연습한 종이나 책을 만들거나 방을 도배할 때 재단하고 남은 자투리 종이‚ 또는 못 쓰게 된 종이 또는 헌책 종이를 많이 이용하였고 소지(素紙)를 물들이거나 기름을 먹여 이용하였다. 만드는 방법에는 지도기법(紙塗器法)‚ 지호기법(紙糊器法)‚ 지승기법(紙繩器法) 등이 있다. *김성규(金星圭‚ 1863(철종14)-?) 조선말기의 문신학자. 자는 찬형‚ 호는 초정(草亭)‚ 운빈‚ 안동 김씨이다. 경북 문경지역에서 세거하다가 조부 석근 대에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석룡리에 이주했다. 아버지 병욱(炳昱)은 연풍(延豊: 현 충북 괴산군) 현감(縣監)을 역임했는데‚ 그곳에서 김성규는 출생했다. 모친은 전주 이씨이며‚ 가학으로 유학을 공부하다 뒤에자살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통관료에서 계몽적인 관료로 전환하는 사례를 잘 보여준다. 한편‚ 그는 1934년에 ‘초정거사묘자지(草亭居士墓自誌)’를 썼는데‚ 그의 문집 《초정집(草亭集)》에 실려있다. 《초정집(草亭集)》에는 수리‚ 재용‚ 양전 등 경세책 외에도 동학과 삼일운동에 관한 그의 견해가 반영된 여러 저술이 담겨있어서 크게 참고된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 전라남도·전남대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2002 / 맹인재‚“한국의 민속공예”‚세종대왕기념사업회‚1979 서울에 올라가 수학했다. 그는 25세 때인 1887년(고종24년)에 광무국주사겸친군우영문안(光務局主事兼親軍右營文案)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 5국 전권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부임하려다 홍콩에서 청국에 의해 저지받아 되돌아왔다.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맡았으나 특히 1894년 고창현감‚ 1897년 장성군수‚ 1899년 전라남도 양무감리(量務監理)‚ 1903년 무안향감리 등으로 활동할 때 수많은 공문서를 문집에 남겨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옴으로써 19년간의 관직생활을 마쳤다. 그의 3남 7녀 중 장남은 우진(祐鎭)으로서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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