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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배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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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배인길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배인길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571년(선조 4) 상세설명 봉화읍 석평리 유록동에는 고색이 창연한 쌍절각이 있으니 이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예천의 용궁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배인길 의사와 그의 부인 월성 이씨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旌門)이다. 조선 선조 4년(1571) 유록동에서 참봉 배삼근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사물을 관찰하는 바가 깊어 주위의 기대가 컸다. 의협심과 용맹을 겸비하면서 지모가 뛰어났으므로 관찰사였던 백부 배삼익은 어린 선생을 좋은 선생밑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한편 선생은 남자로 태어나서 나약하게 방안에만 앉아 글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무예를 연마하여 국가가 위기에 처하게 될 때 나라를 구하는 것도 남자가 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낮에는 무술을 연마하고 밤에는 글공부를 하면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6월 왜군의 제1진을 지휘하는 고니시 유끼나가의 병력이 예천땅 용궁에서 우리 군사들과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평소에 닦아왔던 무예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기꺼이 참여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안동의 예안현감을 찾아가서 출병할 것을 간청하여 군마와 병사 3백명을 지원받아서 용궁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때 용궁의 전장에서는 우리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나 선생의 지원병 3백명이 도착하자 우리 군사의 사기가 충천한 반면 왜병은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일단 퇴각하였다. 탁월한 무술을 발휘하여 많은 적군을 쓰러뜨린 선생은 왜군의 후속부대가 다시 공격하여 오자‚ 우리 군들은 패하고 말았고 선생은 홀로 싸우다 적의 집중공격을 받아 전사하였으니 이때가 선조 25년(1592) 6월 15일이며 선생의 나이 22세였다. 한편 선생의 고향에서는 밤낮으로 무운을 빌고 있던 부인 월성 이씨에게 선생의 애마가 주인을 잃은 채 혼자 돌아오고 있었다. 이것은 선생의 전사통보였다. 슬픔에 싸여 식음을 전폐하던 이씨부인은 비장한 결심을 한 후 몸을 단정히 한 후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잘라 치마폭에 혈서를 썼다.그리고는 선생의 명복을 빈 다음 스스로 자결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생의 유해를 찾지 못한 고향에서는 봉화읍 석평리 호애산에 의관장으로 장례를 하였는데 후일 이것을 의사총이라고 불렀다. 선생 부부의 쌍절을 기리기 위해 사림에서 건의하여 순조 17년 조정에서 쌍절각을 세우고 선생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본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60년마다 돌아오는 임진년의 6월 15일에는 선생의 후손들과 사림에서는 추모제를 거행하여 왔다. 참고문헌 : 영남인물고‚ 봉화군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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