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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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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설경성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설경성 활동시기 : 고려시대 상세설명 세상에는 기인(套人)도 많고 도인(道人)도 많다. 우리의 설경성은 기인이고 도인이였다. 의술에 있어서는 고금에 그 유가 드물정도로 뛰어나서 원나라와 고려에서 신인(神人)으로 알려졌다. 자신이 말하기를 계림인(鷄林人)이며 설총의 후예라고 했으니 경주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대대로 위업을 천직으로 삼았고 명의(名醫)의 이름을 많이 냈다. 그가 태어난 것은 고종 24년(A.D.1237)이였으니 몽고의 침략을 당해서 온 나라가 어지러울 때였다. 몽고는 고종 18년이래 고려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펴서 각처에서 싸움이 계속되었다. 고려는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고 끝까지 그들과 싸울 것을 결심했다. 설경성이 태어난 이듬해인 고종25년에는 몽고병이 경주에 쳐들어 와서 신라의 유물 유적을 많이 불사르고 물러갔는데 황룡사의 9층탑이 불탄 것도 바로 이 때 였던 것이다. 몽고와의 전쟁은 그후도 오래 계속되어 실질적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고종 46년(A.D.1259)이나 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서울을 다시 개성으로 옮긴 것은 원종 11년(A.D.1270)이였으니 참으로 긴 전쟁시대였다. 따라서 설경성은 34세까지의 젊은 한 시절을 전쟁 속에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 의술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상약의좌(尙藥醫左)에 올랐다. 나이 30세에 벌써 명의라는 칭찬을 받았다. 명성에 따라 벼슬도 올라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거쳐 첨의사사(僉議司事)에 이르렀다. 충열왕이 병이 났는데 백약이 무효라 모든 전의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왕을 진맥한 설경성은 단 세 첩의 약으로 왕을 완전히 치료하여 그의 명성은 온 조정을 휩쓸었다. 충열왕은 생명의 은인으로 그를 대접하고 병만 나면 설경성외에는 손을 못쓰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 때에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가 병을 얻었다. 당시의 원나라는 세계를 정복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위치에 있었으며 서울인 연경(燕京)은 세계의 서울인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니 이름 높은 의사도 많았다. 세조의 병이니 온 천하에서 명의라는 명의는 다 불러들였다. 그러나 세조의 병에는 차도가 없었다. 세조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고려에도 들려왔다. 충열왕의 왕비는 세조의 맏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長公主)였는 까닭에 왕비의 근심이 대단했다. 왕과 왕비는 설경성을 보내서 세조의 병을 치료하도록 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는 설경성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세조의 병을 거뜬히 치료했다. 이제는 온 원나라 조정이 놀랐다. 설경성이라는 고려의 한 의사가 온 원나라를 떠들게 한 것이다. 세조는 설경성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고 그를 총애했다. 이러는 사이 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고향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세조에게 귀국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세조도 말릴 수가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경성은 가족을 데리고 원나라로 갈까 했으나 가족들이 이국만리 땅에 가는 것을 극구 반대하니 어찌 할 수가 없어 그냥 고려에 남도록 했다. 그러나 원나라 세조는 경성이 고려에만 있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겨 다시 원에 불러들였다. 이후로는 고려와 원나라를 왕래하면서 의술을 통한 그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했는데 그에 대한 대접은 여전했다. 마침 경성이 고려에 나와 있을 때‚ 성종이 병들어 눕게 되었다. 원나라에서는 아무도 고칠 의원이 없어 급히 경성을 불렀는데 역시 그의 의술은 승리였다. 원나라의 모든 의사들이 항복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설경성은 의술로서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제일 가는 나라였던 원나라에서 제일 가는 의사가 되어 크게 나라를 빛냈던 것이다. 그간 벼슬도 올라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고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원나라 황제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고 고려 왕의 총애도 받았으며 의술에서 세계 제일의 명성을 얻었으니 지위고 돈이고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러나 후손을 위해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훌륭한 인격을 갖춘데다가 훌륭한 기술을 가졌을 때 비로소 기술도 더욱 빛나는 것이며 하늘도 복을 내릴 것이다. 경성의 아들 문우(文遇)가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司成)에 이른 것도 오랜 세월 동안 쌓아 올린 공덕의 결과이다. 설경성……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역사상 최초의 과학자로써 자자손손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질적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고종 46년(A.D.1259)이나 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서울을 다시 개성으로 옮긴 것은 원종 11년(A.D.1270)이였으니 참으로 긴 전쟁시대였다. 따라서 설경성은 34세까지의 젊은 한 시절을 전쟁 속에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일찍 의술로써 과거에 급제하여 상약의좌(尙藥醫左)에 올랐다. 나이 30세에 벌써 명의라는 칭찬을 받았다. 명성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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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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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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