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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생지
    평양
  • 출생연도
    1913-03-27 ~ 2012-07-03
  • 직업
    화가
  • 주요이력
    • 홍익대 교수미술대전 운영위원장예술원상은관문화훈장서울시문화상

일본의 식민지시대를 거쳐 한국전쟁과 1,4후퇴를 겪고 그 과정에서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해야 했던 윤중식. 굴곡진 그의 개인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그의 회화를 단순히 형식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붉은 하늘과 황혼이 내려앉은 시골풍경,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등이 왠지 모를 애잔함과 절절함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전쟁 통에 잃어버린 가족을 향한 그리움, 평양에서 보낸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의 편린 등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윤중식은 우리 민족의 향토성과 서정적 감성을 독자적인 그림 언어로 풀어간 작가라 할 수 있다. 윤중식은 1913년 평양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군자를 다룰 만큼 문기를 갖춘 아버지, 피아노와 작곡 등 예술적 재능이 남다른 형제들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숭실중학교를 다니던 1931년 녹향회 공모전과 선전에 입선하며 화단에 등단한다. 1936년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武蔵野美術大学))로 진학해 서양화를 전공했다. 이 시기 윤중식은 일본의 관학 동경미술학교의 아카데미즘과는 다른, 사립인 제국미술학교의 자유로운 학풍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1930년 일본 화단으로 유입된 야수파,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 서구미술 경향을 경험하게 된다. 해방 직전 한국으로 귀국한 윤중식은 평북 선천 보성여자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며 1943년 이중섭, 문학수, 김병기, 황염수 등과 함께 평양체신회관에서 6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귀로-119 이미지

귀로-119

  • 저작자
    윤중식
    분류(장르)
    미술
  • CC BY-NC-ND[저작권정보 표시-비영리-변경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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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6.25전쟁과 1.4후퇴는 그에게 아내와 딸을 헤어지게 되는 슬픔을 안겨준다. 둘째 딸마저 병으로 잃게 되고 아들과 단둘이 남게 된 윤중식은 슬픈 삶 속에서 열정적으로 그림 제작에 임했다. 그 결과 1953년 <제2회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며 이듬해에는 그의 첫 개인전을 서울 화신화랑에서 개최했다. 이때 출품한 <귀로>(1954)를 보면 담벼락을 배경으로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왼쪽으로 기울어진 전신주에서 시대의 고단함, 고향을 잃은 상실감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 등이 느껴지고 화면 전반에 흐르고 있는 붉은 색은 그의 아픔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담벼락, 집, 산, 하늘 등을 층층이 쌓아올린 화면 구성이다. 이는 1960년대 이후 윤중식 회화의 조형적 특성으로 자리 잡는데, 그는 풍경적 요소를 수평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안정감 있는 구도를 완성하였다. 또한 화면을 구획하고 형태를 결정짓는 어두운 색의 굵직한 선은 그의 조형어휘 중 눈여겨봐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 요소이다. 붉은 색 혹은 황색톤이 주가 되는 단색조의 회화임에도 그의 작품이 단조롭지 않고 색 하나하나가 강렬한 인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화면에 율동감을 부여하는 이 선묘 때문이다. 이러한 형식은 1970년대로 들어서 한층 더 무르익어 향토적 느낌과 서정성보다는 굵은 선묘와 채도 높은 색감의 강렬한 대비가 더욱 두드러졌다. 또한 각기 다른 선의 굵기, 두텁게 바른 붓 터치 역시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는 요소가 되었다. 이른바 윤중식 회화의 전형이 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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