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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산안양암십일면관음보살상인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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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만수산안양암십일면관음보살상인쇄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문자나 그림 등을 새겨 인쇄(印刷)할 수 있게 만든 판(板). <유래 및 발달과정> 인쇄판은 옛날의 목판‚ 활자판을 비롯하여 근대의 볼록판‚ 평판‚ 오목판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인쇄는 인류의 과학과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에는 전자‚ 광선‚ 자력 등으로 인쇄물을 만드는 일‚ 또는 그 기술을 포괄한다. 그러나 근대식 연활자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오로지 목판과 활자판의 인쇄가 인류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 구실을 하였다. 우리나라의 초기 인쇄도 목판인쇄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기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光?陀羅尼經)』목판권자본이 751년(경덕왕 10년) 무렵에 간행된 점으로 미루어 그 이전으로 소급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초기 목판인쇄는 본문 내용이 짤막한 『다라니경』 등의 불경을 소형 판에 새겨 다량으로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한 데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9세기 후반기인 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시문(詩文) 등의 일반 학문서적을 판각해 내는 단계로까지 널리 보급되었다. 고려시대로 들어와서는 불교가 국가적 종교로 승격‚ 호국이념과 결부되어 그 진흥책이 더욱 강화되자 불교서적의 판각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판본은 활자인쇄에 의한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활자 인쇄는 인출 부수에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요구되는 책을 넉넉히 공급하여 줄 수 없었다. 그 결과 목판인쇄가 촉진되었다. 더욱이 조선의 건국이념인 숭유우문정책을 적극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유교경전을 비롯한 역사‚ 시문 계통의 서적을 전국적인 규모로 펴내야 했다. 또한 주자소에서 찍어낸 활자본‚ 또는 중국에서 도입한 책을 번각 또는 판각하여 그 책판을 잘 간직하면서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찍어내어 두루 공급해 주어야 했다. 근대에는 1883년에 서양식 인쇄기계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들어왔다. 이곳의 인쇄시설은 수동식 활판기로서‚ 이것으로 제일 먼저 찍은 것이 『한성순보(漢城旬報)』이다. 박문국에 뒤이어 1884년에 광인사인쇄공소(廣印社印刷公所)가 근대식 인쇄기계와 연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은 본래 목활자 인쇄를 해오던 최초의 민간출판사로서 자가인쇄시설을 보유함은 물론‚ 처음으로 한글연활자도 갖추고 있어 『충효경집(忠孝經集)』‚ 『농정신편(農政新編)』등 많은 책을 간행하였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방형(方形)의 목제(木製) 인쇄판(印刷版)이다.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觀音菩薩)이 암석(巖石) 위에 있는 모습을 돋을새김으로 새겼다. 보살은 원형 두광(頭光)을 하고 있으며‚ 여러 개의 손에 각각의 지물(持物)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화려한 천의(?衣)와 지물이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인쇄판의 하단에는 ‘萬壽山 安養庵(만수산 안양암)’이라는 제목이 새겨져 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2. 김원룡 감수‚『한국미술문화의 이해』‚ 예경‚ 1994.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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