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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패(五馬牌)
- 저작물명
- 오마패(五馬牌)
- 저작(권)자
-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 출처
- 공표년도
- 창작년도
- 2015-01-28
- 분류(장르)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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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정보
- <정의> 마패(馬牌)는 관원(官員)이 공무(公務)를 수행할 때‚ 말을 이용할 수 있는 증표(證票) <발달과정/역사> 황동(黃銅)으로 만들었으며‚ 한 면에는 관원의 품계에 따라 규정된 마필의 수‚ 다른 면에는 자호(字號)와 년 월‚ 그리고 전서체(篆書體)로 `상서원인(尙書院印)`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다. 우리나라에서 마패 제도가 시행된 것은‚ 고려 원종(元宗) 15년(1274)부터 이다. 조선시대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들 모두에게 마패를 지급했는데‚ 병조(兵曹)에서는 직급에 따라 증명서를 발급하고‚ 상서원(尙瑞院)에서는 마패를 지급하였다. 또한 각 도의 관찰사와 절도사에게는 모두 역마를 동원할 수 있는 발마패(發馬牌)를 지급하였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본 유물은 복제(複製)한 것으로‚ 앞면에 말 한 마리가 양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尙瑞院 閏字號五馬牌 擁正八年 六月日(상서원 윤자호 오마패 옹정팔년 육월일)`과 상서원 인장이 양각되어 있다. <제원> 지름 : 7cm * 마패(馬牌) : 대소 관원이 공사(公事)로 지방에 나갈 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증빙(證憑)으로 사용하던 패. 고려시대 역참제(驛站制)와 파발제(擺撥制)에 의한 통신의 중요한 수단으로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그 규제를 위하여 마패제(馬牌制)가 실시되었다. 이 제도는 그대로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1435년(세종 17)에는 새로 마패를 만들어 왕족‚ 관찰사‚ 절제사‚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 개성유수 등에게 발급하고 구패는 회수하였다. 이 신패는 조선 후기까지 똑같은 형태로 유지되고 주조(鑄造)만 거듭되었다. 지름이 10cm정도 되는 구리쇠로 만든 둥근 패에 연호 연월일과 `상서원인(尙書院印)`이라 새기고‚ 한 쪽 면에는 말을 새겼는데‚ 말의 수가 1마리부터 10마리까지 여러 종류가 있어 급마규정(給馬規定)에 따라 지급하였다. 또한 암행어사에게 지급된 마패는 어사가 인장 대용으로 사용하였고 어사출두 때는 역졸이 손에 들고 `암행어사 출두`라고 크게 외쳤다. 조선 후기 상하이[上涇]에서 김옥균(金?均)을 살해하고 돌아온 자객(刺客) 홍종우(?鍾宇)가 전북 순창에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의 마패를 훔쳐 서울까지 도망쳤던 일은 마패에 얽힌 최후의 사건이다. * 연호(年號) : 임금의 재위 연대에 붙이는 칭호. [`광무(光武)` `융희(隆熙)` 따위.] 다년호. 원호(元號). * 병조(兵曹) : 고려와 조선 시대의 육조(六曹)의 하나. 무선(武選) 군무(軍務) 의위(儀衛) 우역(郵驛)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음. * 상서원(尙瑞院) : 조선시대의 관청. 조선 개국년인 1392년 창설한 상서사(尙瑞司)를 1466년(세조 12) 개칭한 것으로‚ 새보(璽寶) 부패(符牌) 절월(節鉞)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관원으로는 정(正:정3품 당상관) 1명을 두되 승정원(承政院)의 도승지(都承旨)가 겸직하고 판관(判官:정5품) 직장(直長:종7품) 각 1명‚ 부직장(副直長:정8품) 2명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 저작물 파일 유형
- 저작물 속성
- 1 차 저작물
- 공동저작자
- 1유형
- 수집연계 URL
- http://www.emuseum.go.kr
- 분류(장르)
- 사진
- 원문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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