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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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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백자명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명기란 중국에서 껴묻거리(副葬品)로서 매장한 기구로 귀기(鬼器) ·가기(假器)라고도 한다. 신명(神明)의 기(器)라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죽은 후의 세계에서 사자(死者)가 사용할 생활용구를 분묘에 넣어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무덤 속에 넣기 때문에 주로 흙을 구워 만들었다. 죽은 자가 생전에 사용한 기구 ·인물 ·동물 등을 모조한 것들이다. 은(殷) ·주(周)시대의 무덤에서 출토한 청동이기(靑銅彛器)와 도기‚ 전국시대의 무덤에서 출토한 흑도상(黑陶像)‚ 도질(陶質)의 솥(鼎) ·항아리(壺) ·두(豆:제사 때 쓰는 제기) 등은 모두 명기로서 만들어 진 것이다. 한대(漢代)에는 명기 제작이 더욱 성행하여 크고 작은 인물의 토우를 비롯하여 개 ·돼지 ·닭 등의 동물‚ 가옥 ·창고 ·우물 ·솥 ·가구 ·식기 등의 모형이 제작되었다. 남북조시대의 명기는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수(隋) ·당(唐)나라 때에는 삼채유(三彩釉)를 사용하여 사실성이 있는 말 ·낙타 ·인물 등을 만들었다. 명기 제작은 송(宋) ·원(元)나라를 거쳐 명(明) ·청(?)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명기를 껴묻는 풍습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어‚ 조선시대에는 사람 ·말 ·항아리 등의 명기를 만들었다. 고래의 풍습인 순장(殉葬) 대신 명기를 부장한다는 뜻도 있어 이것을 묻으면 죽은이의 영혼이 위로를 받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명기를 만드는 풍습은 조선 인조 이후에는 실례를 찾아볼 수 없다. 본 유물은 모두 22점으로 회청백색이 감도는 백자유가 시유된 접시‚ 대접‚ 소호(小壺)‚ 완의 기형을 가진 백자명기들로 유약상태가 고르지 못하다. 흡사 어린이들의 소꿉장난감과 같은 느낌을 주지만‚ 죽은 사람에 대해 기록한 묘지(墓誌)와 함께 넣어지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접시의 내저에 원각(圓刻)이 깎여 있는 점‚ 또는 동체(胴體)가 벌어진 병의 형태로 보아 조선시대 16세기 후반경의 명기들로 추정된다. 굽다리에는 가는 모래받침으로 받쳐 구운 흔적이 남아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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