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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서장군묘비탁본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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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경서장군묘비탁본첩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김경서(1564∼1624)는 임진왜란 당시의 무장으로 본관은 김해‚ 자는 성보(聖甫)이며 용강에서 살았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선조 21년(1588)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집안이 미천한 탓으로 파직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다시 기용되었다. 그 해 8월 조방장(助防將)으로 평양공략에 나섰으며‚ 싸움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평안도 방어사에 승진되었다. 다음 해 1월 명나라 이여송(李?松)의 원군과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운 뒤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도원수 권율(權慄)의 지시로 남원 등지에서 날뛰는 토적을 소탕하였으며‚ 1595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597년 도원수 권율로부터 의령의 남산성(南山城)을 수비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불복하여 강등되었고‚ 1603년 충청도병마절도사로 군졸을 학대하고 녹훈(錄勳)에 부정이 있어 파직되었다가 1604년 전공을 인정받아 포도대장겸도정(捕盜?將兼都正)이 되었다. 광해군 1년(1609) 정주목사를 지내고 이어 만포진첨절제사(만포진첨절제사)와 북로방어사를 역임하고‚ 1615년 길주목사‚ 1616년 함경북도병마절도사‚ 2년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때‚ 임진왜란 이후 세력이 강성해진 건주위(건주위)의 후금 정벌을 위해 명나라의 원군 요청이 있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강홍립(강홍립)과 함께 출전하였다. 이듬해 심하(심하)지방에서 전공을 세웠으나 살이호(살이호)의 전투에서 명라나 군사가 대파해고 선천군수 김응하(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이계종) 등이 전사하자 강홍립과 함께 적진에 통하여 출병의 부득이함을 말하고 잔여병과 함께 후금에 투항하였다. 포로가 된 뒤 비밀리에 적정을 탐지한 기록을 고국에 보내려 했으나 강홍립의 고발로 탄로 나서 처형되었다. 우의정에 추증되고 향리에 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양의이다. 이 자료는 김경서장군의 묘비를 탁본하여 엮은 탁본첩으로 총 1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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