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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영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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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택영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김택영(1850-1927)은 한말의 학자로 본관은 화개(花開)‚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으로 개성 출생이다. 1891년 진사가 되고‚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역임하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903년 다시 홍문관찬집소(弘文館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 속찬위원(文?備考續撰?員)으로 있다가‚ 뒤에 통정대부(通政??)에 오르고 1905년 학부(學部)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던 중 1908년 중국으로 망명‚ 퉁저우[通州]에 살면서 학문과 문장수업으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나 문장과 학문에서 청나라 캉유웨이[康有爲]·정효서(鄭孝胥)와 어깨를 겨누었다. 저서에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계(韓史)》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중편한대숭양기동사집략구전(重編韓代崧陽耆東史輯略舊傳)》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서간은 김택영이 황원에게 보낸 것이다. 오늘 아침 형에게 답서를 우송하고 오후에 또 글을 받았습니다. 촌자운(村字韻)의 시는 뛰어난 시(詩)이지만‚ 청컨대 제 3귀(句)를 고쳐 ‘초선대유어선취(樵船?有漁船趣)’라 함이 어떻습니까. 연암집 일은 내가 이미 이 노인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만들려고 했는데 또 망령된 생각이 납니다. 청컨대‚ 형의 훈계를 받들겠습니다. 매천집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은 문장력이 천시를 동(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형의 이른바 복(福)이란 한 글자는 또 썩 능란한 이론입니다. 홍연천(??泉)의 문(文)과 유득공(柳得?)과 를 권하기에 개성가고와 혼합하여 보낸 것이 6책인데 잘 도착했습니까. 만약 걱정이 없다면 후한 값이고‚ 3원 같으면 알맞은 값이라 할 것입니다. 최(崔)군 편지는 이미 답해서 보냈습니다. 내가 평생에 남과 논쟁한 적이 없는데 하물며 그 조카와 문인에게 그러하겠으며‚ 더구나 최(崔)를 해풍 부원군(涇豊府院君) 집에서 서로 안 지가 10년이나 된 사람인데 그러하겠습니까. 그래서 글을 만들기를 온화하게 하고 사과하는 태도로 지어 다시는 다투는 번거로움을 없앴습니다. 형의 이름은 최군 편지 속에 없었으니 염려마십시오. 그러나 중국은 진백사(陳白沙)가 주자(朱子) 화상(畵像)을 매질하고‚ 왕양명(?陽明)은 주자를 반대하였으나 두 사람은 다 주자와 같이 태학관(?學館)에서 향사(享祀)하고‚ 남통(南通)에는 또 주자의 자손이 많지만 내가 격물설(格物說)로 주자를 비방하는 것을 듣고도 조금도 원망하는 빛이 없었는데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의논이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니‚ 그 좁고 고루함이 이와 같습니다. 동국사는 대략 3백 페이지인데 고려(高麗) 이상‚ 이하가 가각 1백 50페이지로‚ 그 비용은 우송비를 빼고도 3백원(元)이 될 것이니‚ 만약 호남 군자로 하여금 먼저 1백50원을 보내면 고려 이상사(高麗以上史) 2책을 간행해서 저렴한 가격으로 고국에 팔고‚ 또 그 판 돈으로 고려사 1백 50페이지 2책을 간행하면 아주 좋겠습니다. 보서(補書) 최씨에게 답장한 글은 내가 단연코 졸집에 넣어서 전하려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초고를 남겨 두지 않았으니‚ 이제 어떻게 베껴 보내겠습니까. 대개 글 속의 뜻은 을미‚ 병신년 사이에 내각 편사국(內閣編史局)에 있을 때 거의 계유소(癸酉疏) 전문(全文)을 보았는데 ‘일을 맡은 신하가 임금의 총명을 가로막고’ 등의 구절에 이르러서 내 생각에 너무 과격하기에 그 뒤 죽은 벗 황매천에게 한 번 이야기 한 바 있었습니다. 이제 주신 편지를 보니‚ 의리에 근거한 바가 매우 명백한 것이어서 내가 잘못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기타참조>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참고문헌>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상‚ 미래문화사‚ 1985.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전싱문화연구원‚ 1992. 박제가(朴齊家)의 시(詩)는 문장 아닌 것이 없지만 모두 간행 못하고 없어져 버렸으니‚ 신후지복(身後之福)이 없기 때문입니다. 동국사(東國史)에 대하여 말한 것은 어찌 그리 사람을 감격케 합니까. 일찍이 숭양(崧陽) 기구전(耆舊傳)을 간행하지 아니하면 고향의 은혜를 갚지 못한 것이 되고‚ 동국사를 간향하지 아니한다면 고국의 은혜를 갚을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기구전은 다행히 졸집(拙集) 중에 붙여서 간행했으되 동국사는 아직 간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령 글을 지어 파는 돈으로 이것을 간행할 수 있다면 비록 백의 묘문(墓文)이라도 하겠으니‚ 어찌 팔을 걷어올리지 않을리가 있으리오. 누구를 막론하고 행적(行蹟)과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여 보내 주십시오. 졸고는 아직 30부가 있으므로 전일 운초가 팔기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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