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어문

정광필

추천0 조회수 164 다운로드 수 1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정광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정광필 호 : 사훈/수부 활동시기 : 조선시대 본 관 : 동래 상세설명 예 용궁 포내(지금의 풍양면)에서 태어나고 자는 사훈(士勛)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요‚ 이조판서 난종(蘭宗)의 아들로 호는 수부(守?)이다. 공이 벼슬에 오르자‚ 처음에는 성균관 학유(學諭)·의정부 사록(四綠)·봉상시(?常時) 직장(直長)을 지냈는데‚ 작은 벼슬을 낮게 여기지 않고 직책을 다 하기를 더욱 힘쓰니‚ 좌의정 이 극균이 한번 보고 정승될 그릇으로 기대했다. 이 때 극균이 성종실록(成宗實錄) 총재관이 되었는데‚ 고을 뽑아 도청(都廳)을 삼고 편집하는 일을 맡겼다. 관원(館員)이 여름 고과(告課)에 모두 강등되어 중등(中等)이 되자‚ 공도 이를 면치못했다. 동료들이 추측하기를 다시는 출사하지 않으리라 했는데‚ 극균이 말하기를‚ '정(鄭)의 넓은 도량으로 반드시 상관하지 않으리라' 하더니 얼마 후 과연 출사했다. 1533년(중종 28년)에 김 안로가 정권을 잡자 공을 줄이려고‚ 공이 희릉(禧陵) 총호사(摠護使)가 되었을 적에 선후(先后)를 불길한 땅에 장사하였다고 얽어서 죄를 만들어 중형에 처하기를 청했다. 조금있다가 금오랑이 전하기를 "극형에서 감형되어 김해로 귀양을 보내다"하니 머리를 조아리면서‚ "임금님의 은혜가 지극합니다."하였다. 귀양가는 길에 시 한수를 지으니‚「훼방이 산같이 쌓였으나 마침내 용서함을 받았네. 이생에 임금 은혜에 대답할 길 없구나. 열 번 높은 고개를 넘는데 두 줄기 눈물이오‚ 세 번 장강(長江)을 건너면서 홀로 혼이 끊어지네. 아득히 높은 산엔 구름이 먹을 뿜고‚ 망망한 들판에는 비가 항아리를 쏟는 듯하네‚ 저물게 바닷가 동쪽 성 밖에 다다르니 초가집이 쓸쓸한데‚ 대나무로 문을 삼았고녀」하였다. 공의 자제들은 공에게 어떤 화가 닥칠지 모르므로 모두 김해에 따라가 있었다. 1537년(중종 32년)에 이르러 안로가 죄를 받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서 공을 불렀다. 종들이 조보(朝報)를 가지고 급히 달려가서 밤중에 적소(謫所)에 당도했는데‚ 공은‚ "그러냐"할 뿐 코를 골면서 달게 자고 이튿 날에야 그 글을 본 뒤에 서울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반기며 기대하였으나 얼마 안되어 작고했다. 1519년(중종 14년)에 수상이 되었을 때 임금이 천재의 변으로 인해서 사정전(?政殿)에서 신하들에게‚ "천재의 원인이 될 만한 정치의 잘못이 있는가"를 물었다. 좌우가 서로 재앙을 없앨 계책을 아뢰는데‚ 신진사류 한 충(韓忠)이 나와 아뢰기를‚ "전하께서 비록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 잘하기를 힘쓰시나 비루한 자가 감히 수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재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며‚ 좋은 정치는 가히 바랄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대신들이 빈청으로 물러 나오자 우상 신 용개(申用漑)가 성낸 낯빛으로 말하기를 "신진선비가 대신을 면대해서 배척하니 이 습관을 기를 수 없다"고 하였으나‚ 공은 손을 저어 말리면서 "그들이 우리가 노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인데‚ 만일 조금이라도 우리를 꺼리고 있다면 반드시 즐겨 이런 말은 하지 못할 것이요. 나에게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고 또 나이 젊은 사람의 바른 말하는 풍투를 꺾어 억제하는 것은 좋지 않다."하니 용개도 그 말에 탄복하고 듣는 자들도 대인(?人)의 도량이라고 말했다. 참고문헌 : 왕조실록 연려실기술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