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검색어

※ 최근검색어는 10개까지만 표시 됩니다.

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고창읍성 (高敞邑城 ‚ Gochangeupseong Fortress )

추천0 조회수 120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문의하기

※ 문의내용은 담당자 검토 후에 답변 드립니다.
 답변 내용은 마이페이지 > 문의하기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필수입력
분류
이미지
저작물명
고창읍성 (高敞邑城 ‚ Gochangeupseong Fortress )
필수입력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고창읍성 (高敞邑城 ‚ Gochangeupseong Fortress )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5 건)
출처
이용조건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1유형 출처표시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9-09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 개요 >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외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총화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 만들어 졌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 145호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50‚172평)로 동.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소의 치성(雉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字)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축성 당시에는 동헌과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었으나 병화로 소진된 것을 1976년부터 성곽과 건물 14동을 복원·정비 하였다
고창읍성의 축성연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고창읍성의 관아건물 보수시에 나타난 상량문과 각종 문헌 및 성돌에 새겨진 글자들을 보면 이 성은 조선 세종 32년(1450)부터 단종 원년(1453)까지 전라좌우도 19개 군·현에서 구간별로 분담하여 축성한 흔적이 성벽 구간마다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무장시면(茂長?面)·무장종(茂長綜)이라는 흔적이 있으며‚ 동문옹성성벽에는 계유소축감동송지민(癸酉所築監董宋芝?)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어서 이를 해석해 보면‚ 고창읍성이 계유년에 축조되었으며 무장현이 축성에 참여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고창읍성에 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고창현성곽조(高敞縣城郭條)에 처음 나타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중종 25년(1530)에 간행했으나 단지 증보처에 신증 이라는 두 글자만 표시하였으므로 성종때 왕명에 의하여 김종직 등이 동국여지승람의 제 2차 수정을 거쳐 탈고한 성종 17년(1484)이전의 계유년으로 축성연대가 압축된다 할 수 있으며 무장현은 태종 17년(1417)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무장현이 되었으므로 계유소축의 계유년은 1417년 이후의 계유년이 되므로 고창읍성은 1453년의 계유년에 축성된 것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밟으면 병이 없이 오래살고 저승길엔 극락문에 당도한다는 전설때문에 매년 답성행사가 계속되고 있다.성밟기는 저승문이 열리는 윤달에 밟아야 효험이 있다고 하며 같은 윤달이라도 3월 윤달이 제일 좋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엿샛날이 저승문이 열리는 날이라고 하여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날에 답성행렬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성을 한바퀴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바퀴돌면 무병장수하며 세바퀴돌면 극락승천한다고 한다. 성을 돌때는 반드시 손바닥만한 돌을 머리에 이고 세번 돌아야 하고 일정한 지역에 그 돌을 쌓아두도록 하였다. 특히 윤삼월의 효험을 강조하고 있음도 겨우내 부풀었던 성을밟아 굳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고 머리에 돌을 이게 함으로서 체중을 가중시켜 성을 더욱 다지게하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기타정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kcti.re.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