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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중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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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어문
저작물명
여중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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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여중룡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5 건)
출처
이용조건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1유형 출처표시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여중룡 활동시기 : 조선시대 출생시기 : 1856년 상세설명 여중룡이 일본 경찰에 잡혀 저들의 회유에 선생은 "신라 박제상이 너희 나라에 잡혔을 때 '신라의 귀신이 될 망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하다가 맞아 죽었는데‚ 지금 나역시 그와 꼭 같은 심정이다"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여중룡을 1856년 구성면 금평동에서 태어나‚ 나이 40에 이르렀을 때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민비 시해사건) 되자 허위 강심형 조동석 등과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항면 대야리에서 이를 제지하려는 관군과 싸워 패하자(독립 운동 전적지 참조) 서울로 올라가 전국의 애국지사를 규합(133명)하고 국가 권익을 보존하기 위해 왜적을 물리치는 데 신명을 돌보지 않고 싸우겠다는 독립운동 단체 충의사를 조직하여 활약했으며‚ 한편으로는 '황성신문'을 통하여 우리 나라 외교‚ 정치‚ 군병‚ 재정 등의 혁신을 주장하여 경국론을 펴서 당시 허약한 정부에 매운 자극을 주었으며‚ 우용택이 병구 등과 정부에 누차 정서를 보내어 침체된 국권회복과 배일 자강책을 건의하고‚ 일본에 대해서는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철병귀국을 강요하는 외에‚ 황제에게는 을사조약의 무효화 선언과 오적의 주토를 상소하고‚ 각국 공산관에는 일본 침략을 폭로하고 후원을 요청하는 공한을 대담하게도 누차에 걸쳐 보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연행되어 조사받은 일이 많았다. 1906년 4월에는 말과 글로서는 일본 침략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우용택‚ 이병구‚ 조우석 등과 일본공사는 폭파하여 궐기의 신호등을 켜려다 지모씨의 가택수색으로 비밀문서가 발각돼 체포되어 심한 고문으로 늑골이 부르지는 등의 심한 상처를 입었다. 7개월만에 방면되어 1907년에는 허위‚ 이강년‚ 강형원 등과 서울 혜화동에 모여‚ 허위와 강형원은 안동 풍기에서 기병하여 원주를 거쳐 상경하고‚ 이강년은 상주 문경에서 기병하여 충주를 거쳐 상경‚ 여중룡은 김산에서 기병하여 전주 최익현 군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전군이 합루하여 항일전을 크게 벌이기로 혈서로써 맹세하였다. 기병의 사명을 띠고 김산으로 돌아와 쉴 사이도 없이 활약하면서 김산무기고에서 포 80자루를 거두고‚ 군병 180명을 모았다. 날이 갈수록 의병군에 많은 군사가 모이자 8월 10일에 무주를 거쳐 전라도로 행군키로 작정하고‚ 9일 밤 만반의 준비를 끝내자 연일 연야의 격무에 고문으로 얻은 병이 악화되어 많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길로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1913년「내 비록 살아서 적을 쳐부수지 못했을 망정 죽어서 사나운 귀신 되어 꼭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어디 두고 보자」라고 뼈에 사무친 유언을 하고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79년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었고‚ 김천시 남산공원에는 선생의 순충기념비가 세워졌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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