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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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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어문
저작물명
원효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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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원효대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5 건)
출처
이용조건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1유형 출처표시
공표년도
창작년도
분류(장르)
어문
요약정보
원효대사 호 : 서당(書堂) 활동시기 : 삼국시대 시대 : 삼국시대 상세설명 통일된 신라에 두 개의 정신세계의 지주는 화랑도와 민족화한 불교이었다. 민족화한 불교정신을 골고루 보급‚ 교화시킨 기라성처럼 많은 고승 중에도 으뜸가는 중이 경산에서 태어난 원효대사이다. 기라성처럼 많은 고승 원광‚ 자장‚ 의상 등이 모두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였지만 원효는 불교의 참뜻을 얻기 위하여 굳이 유학을 고집하지 않았다. 또 원효는 비구계를 깨뜨리고 아들을 두었어도 삼국유사엔 성사라고 크게 높이었다. 원효의 성은 설씨. 617년(진평왕 39년)에 압량군의 남쪽 불지촌의 북쪽 율곡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만삭이 된 어머니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었고 집은 이 골 서남쪽에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적혀 있다. 원효의 조부는 잉피공 또는 적대공이라 하였고 아버지는 신라 17관등 중 11번째 위계인 내마 벼슬의 담날이고‚ 원효의 아명은 서당이다. 꿈에 유성이 품 속에 들어옴을 보고 잉태되었고 해산하려 할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하는데‚ 탄생하자 총명하였고 달리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아니하였다. 648년 32세 때 황룡사에서 중이 되었다. 그의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고 초개사라 하였고 그가 태어난 밤나무를 사라수라고 하였는데 그 곁에 절을 세워 사라사라 하였다. 각종 불전을 탐구하고 수도에 정진하니 뛰어난 자질과 총명이 드러났다. 650년 34세 때 의상대사와 함께 당나라 유학에 떠났으나 고구려 변경 순찰대에 잡혀 수십일 억류된 끝에 되돌아왔다. 그후 다시 당나라에 건너기 위하여 당항성(일설에는 만주 요동)에 이르러 노숙을 하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타서 어둠속에서 물을 찾아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에 해골에 고인 물인 것을 알고 문득 깨닫기를‚ "마음이 생겨서야 비로소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고 마음이 멸한즉 만사는 해골과 다름이 없다."고 외치고 당나라 유학을 뿌리치고 분황사로 되돌아왔다. 철저한 불도의 탐구와 참선‚ 그리고 사색에 잠기는가 하면 때로는 시정잡배와 어울려 놀았다. 원효는 천성이 총명한 데다가 또 작은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호탕함이 있었다. 원효는 작은 수레바퀴가 아니고 큰 수레바퀴이었다. 큰수레는 편편한 곳만이 아니고 울퉁불퉁한 곳도 건널 수 있다. 선도 없고 악도 없고 원래가 무이고‚ 원래가 무이면 태어나고 죽음이 없고‚「모든 것에 장애가 없고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한길로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난다」(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일절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뜻의 무애가를 지어‚ 광대가 큰 박으로 춤추고 즐기는 것을 본따서 이것으로 무애가를 노래하고 춤추며 방방곡곡으로 돌아다니며 무지한 백성을 불법으로 교화하였다. 원효는 법당에서 수도하고 부처를 지키는 것보다 민중에 파고들어 불도를 깨우치게 하고 생활에 실천시키는 데 힘썼다. 설총은 대사의 아들이다. 대사는 색정이 동하여 거리에서 노래하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고. 하늘을 버틸 기둥을 깎아보련다." 자루 빠진 도끼는 여자의 성기이다. 하늘을 버틸 기둥은 국가의 큰 인재를 말한다. 태종이 그 뜻을 알고 홀로된 요석궁주와의 만남을 이룩하게 했다. 그 사이에서 설총이 태어났다. 이렇게 파계하고는 스스로 소성거사라고 부르고 여전히 항간을 다니며 교화함으로 세상사람이 불타의 교를 알게 하였다. 원효는 또한 많은 저서를 남겨 지금에도 원효의 불교 이론은 뛰어나게 빛나고 있다. 686년(신문왕 6년)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원효의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고‚ 그 후 600년이 지난 삼국유사가 쓰일때까지도 분황사에 소상이 안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gb.go.kr
분류(장르)
어문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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