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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필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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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태화필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정태화(鄭?和 1602~1673)의 자는 유춘(捧春)‚ 호는 양파(陽坡).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628(인조 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다. 1673(현종 14)년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난 지 6개월 후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鹿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고‚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시?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陽坡遺稿)"와‚ 1656(효종7)년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가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정태화가 형에게 올린 글이다. 먼저 보내준 글을 받고 위로를 드리며‚ 민소가 올라왔다고 하는데 본인 역시 지금 상소문을 올려 사직을 하려한다고 적었다. 또 포상과 폄하가 앞에 당했는데 이미 나아가 참여하지 못하면 한 번 상소를 올리는 것도 어려울 듯 하니‚ 이 글이 병조에 보내지는 것을 다시 사양하지 말라고 적고 있다. 伏承 下札 渙慰阻懷 閔疏最侵廊廟 弟亦今方構疏辭職 呵呵褒貶 當前旣不得進參 則一番陳疏 似難已也 若不許遞 當以封書送于兵曹 不須更辭也 閔疏雖有云云 此與論啓不同 何可因此等待有若臺論乎 今日亦可呈疏矣 他未一 ?和 <기타참조> "편지-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 순천대박물관‚ 2003. <참고문헌> "편지-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 순천대박물관‚ 2003.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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