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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성군문적 (?城君 門籍)_계본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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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식성군문적 (?城君 門籍)_계본등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5-29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식성군문적에 대한 설명입니다.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부장으로 활약했던 이운룡(1562∼1610) 장군이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와 장계이다.
이운룡은 선조 18년(1585) 무과에 올라 선전관‚ 옥포만호 등의 벼슬을 거쳤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앞바다에 왜구가 나타나자 적의 거대한 외형에 밀려 대적하지 않고 도망하려는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도망하는 것은 나라와 백성에 대한 배신행위라 하고‚ 이순신에게 원군을 요청‚ 함께 싸워 적선 50여 척을 불태우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후 전쟁기간 내내 우리 수군이 남해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좌수사에 승진하였다. 그가 죽은 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청도의 금호서원과 의령의 기강서원에 그 위패가 모셔졌다.
『거영일기』는 선조 38년(1605) 7월 30일부터 선조 39년(1606) 9월 1일까지의 일을 빠짐없이 기록한 일기이다. 여기에는 병영예식(兵營禮式)‚ 군의 장비‚ 훈련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계본등록』은 선조 38년(1605) 9월 15일부터 선조 40년(1607) 6월 1일까지 수군통제사로 있으면서 왕에게 올렸던 장계 138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헌들은 임진왜란 때 수군의 활약상과 화기‚ 전선‚ 수군편제‚ 훈련과정 등이 총망라되어 있어 조선시대 전쟁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교지(敎旨) 1매는 가로 61.5cm‚ 세로 55cm의 크기로 1607년(선조40년) 3월 2일 장군이 충효장의 선무공신가선대부 식성군(宣武功臣嘉善?? ?城君)에 책봉된 고신(告身)으로 전문 6행 33자로 되어 있으며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찍혀있다.
유서(諭書) 1매는 가로 140cm‚ 세로 70cm로 1605년(선조38년) 8월 21일 이운룡 장군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제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 兼 三道統制使)로 재직 중일 때 병권을 장악한 일선 지휘관에게 출병시의 징표인 부절(符節) 33부를 내리면서 하사한 유서로서 전문 10행 116자로 되어 있으며 유서지보(諭書之寶)가 찍혀 있다.
상서(上書) 1매는 가로 155.2cm‚ 세로 256.8cm로 1758년9영조34년) 11월 경상도 안동을 비롯한 22개 지역의 유생 유량 등 408인이 연명으로 경상도 관찰사에게 선무공신(宣武功臣)인 이운룡 장군을 모시는 사묘의 창건을 소청하는 청원서이다. 이 소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경상도 각 지역의 유림들이 앞서 발의한 상서로 임진왜란사 자료 및 위인전기 자료로써 가치가 높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cha.go.kr/cha/idx/Index.do?mn=NS_01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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