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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康凞)`58년명 암막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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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강희(康凞)`58년명 암막새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기와 중에는 표면에 글자가 새겨진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죽도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직접 쓰거나 도장에 문자를 새겨 찍어서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자와는 중국 한 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제작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태왕 릉 및 천추총에서 출토된 명문전돌이 있으며‚ 백제의 문자와로는 527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통(?通)’명 기와가 현존하는 최고의 예이다. 통일신라의 기와에 새겨진 문자의 유형을 보면 지명‚ 사찰명‚ 제작연대와 관계된 연호와 간지 등이 있으며‚ 그 외에 제작 장소나 기와의 사용 위치를 알려주는 것도 있다. 이 가운데 사찰명이 새겨진 문자와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기존에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려진 절터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기와는 목조 건물의 지붕에 이어져 눈과 빗물의 누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을 결구하고 있는 목재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침수를 막는 방수성과 온‚ 습도의 기후 변화에 오래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그 본래의 기능으로 한 기본 기와와 건물의 경관을 돋보이기 위한 여러 종류의 기와들이 일찍부터 다양하게 제작되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기와가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많은 변천을 겪으면서 계속 사용되었는데‚ 지붕에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나 명칭이 각각 다르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함을 살필 수 있다. 암막새는 암키와의 한쪽 끝에 약간 위로 휜 장방형의 드림새를 덧붙여 제작한 것으로‚ 목조 건물의 지붕에 이어져 형성된 기왓골 끝에 사용되고 있다. 암막새는 막새와 암키와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암막새는 외측에 네모난 주연부가 있는데 대부분 주문이 장식되고 있으며 그 내측에 덩굴과 같은 좌우 대칭형의 꽃무늬가 새겨지고 있다. 이 암막새는 통일신라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기와에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이어졌던 문양의 불교적 상징성과 화려한 장식성이 현저하게 약화되는 대신‚ 기와의 실용적 기능성과 기복적인 성격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종래의 연화문 등이 그 장식성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고려시대부터 기와에 새겨지던 범자문도 드물게 나타난다. 그 대신 ‘수(壽)’나 ‘복(福)’과 같이 기복적인 성격이 뚜렷한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새로이 제작되었다. 또한 막새면에 여러 줄의 세로선을 그은 다음 그 사이의 공간에 연호나 인명 등을 양각한 막새도 유행하였다. 경남 석남사에서 출토된 경질의 명문암막새로 바탕흙은 회청색을 띠며‚ 거친 돌 알갱이들이 많이 섞여 있다. 막새는 가장자리를 6개의 곡면으로 처리하였으며‚ 막새면에는 10개의 세로줄을 그어 칸을 구획하여 ‘강의 오십팔 년○○삼월일석남사○각개와○조시야○원○서탁○○○승서행삼보원경○○○주필장독○○○○도감○○○○○○공○원일○(康熙五十八年○○三月日錫南寺○閣盖瓦○造時也○○?○書託○○○僧序行三?願堅○○○厚必張得○○○○都監○○○○○供○元日○)’라고 양각되어 있다. 막새면 좌측 주연부가 일부 결실되었고‚ 균열과 탈락이 있다. 기와 일부가 남아있어 접합기법이 보이며‚ 뒷면에는 조밀한 포목흔이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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