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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 등잔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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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등잔‚ 등잔걸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2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등잔 : 기름을 연료로 하여 불을 켤 수 있도록 만든 그릇 등잔걸이 : 등잔을 올려놓는 받침대 <개설> 재료에 따라 목제·토제·대리석·백자·사기·놋쇠·철제 따위의 등잔이 있다. 여기에 한지·솜·마사(麻絲) 등으로 심지를 만들어 기름이 배어들게 하여 불을 켠다. <역사> 등잔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게 근원을 밝히기는 어려우나‚ 삼국시대의 발굴품 중에서 각종 형태의 등잔들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등잔 : 신라의 유물로는 토기로 된 다등식와등(太燈式瓦燈)이 있고‚ 백제의 것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자등잔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옥등잔이라고도 하는 대리석등잔이 있었다. 특히 작은 옥등잔은 인등(引燈)이라고 하여 무가(巫家)의 행사에도 사용되었고 연등(燃燈)에도 사용되었다. 큰 것은 지름이 한자〔一尺〕에 달하는 것도 있는데 근래까지도 큰 사찰에서 더러 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등잔이 미의 극치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역시 통일신라의 연등회와 고려의 연등회·팔관회 등에 불을 밝히고 발원하는 신앙행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옥등잔과 함께 청자등잔 또한 고려시대의 값진 예술품이다. 조선시대에는 역시 백자등잔을 빼놓을 수가 없다. 백자등잔은 나무등잔걸이나 철제 또는 놋등경 어디에 얹어두어도 조화를 잘 이루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 백자기름받이를 걸쳐두면 한층 조화를 이룬다. 기름으로는 참기름·콩기름·아주까리기름·호마기름 등의 식물성과 동물성 기름‚ 어유 등을 썼다. 제사 때 불을 켜는 데는 식물성 기름을 주로 애용하여왔다. 1876년경에 일본으로부터 석유가 수입되면서‚ 심지꽂이가 따로 붙은 사기등잔이 대량으로 수입‚ 보급되었다. 우리의 전통적인 등잔은 심지를 그저 그릇가에 대어서 불을 켜거나 발심지를 하여 그릇의 중간에 오게 하여 불을 켜지만 석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바로 기름에 불이 닿으면 연소가 되기 때문에 뚜껑을 겸한 심지꽂이가 따로 붙어야만 하였다. 이것을 우리 기호에 맞게 고안된 등잔이 많이 나왔다. 등잔걸이 : 등가 · 등경걸이라고도 한다. 등가의 밑바탕을 등잔바탕 ·등판이라고 하는데 원형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등 모양이 다양하다. 한쪽에 기둥을 세우고‚ 상단부 한 곳에 등잔걸이를 건다. 기둥에는 적당한 간격으로 톱니형 계단을 만들어 필요에 따라 등잔걸이의 높낮이를 조정한다. 종류도 재료에 따라 목재 ·무쇠 ·유기 ·도자기 등이 있다. 나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며‚ 새 ·꽃 ·동물 등을 투각하거나 양각하였다. 이 등잔과 등잔걸이는 조선시대 이후 사용된 대표적인 백자등잔이지만 뚜껑을 겸한 심지꽂이를 따로 만들었으며 그 모양이나 재질을 보아 근래의 것으로 판단된다. 그을음이 심하고 뚜껑 부분이 약간 깨졌다. 등가· 등경걸이라고도 하는 등잔걸이의 밑바탕을 등잔바탕‚·등판이라고 하는데 나무로 만든 이 등잔걸이의 바탕은 원형이며 기둥을 멋스럽게 깎았다. <사회적 의의> `등잔 밑이 어둡다(燈下不明)` - 가까이서 생긴 일을 오히려 더 모를 수도 있다는 뜻의 속담. <참고문헌> 한국의 민속공예(맹인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7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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