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은투호삼작노리개

추천0 조회수 75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은투호삼작노리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차는 부녀자들의 장신구. <유래 및 발달과정> 언제부터 노리개를 차기 시작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에 요대(腰帶)에 달던 요패나 고려시대에 허리띠에 금방울이나 항료를 넣은 비단주머니를 차던 풍습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노리개로 변한 것으로 추측된다. 노리개는 조선시대 여성의 장신구로서 전시대(前時代)에 많이 애용하던 목걸이나 귀걸이가 쇠퇴한 대신 가장 다양하게 발달한 장신구이다. 궁중에서는 가례‚ 탄일 등 특별한 축의일에는 왕비를 비롯하여 그날 참례하는 귀부인들까지 삼작노리개를 찼으며 평상시에도 왕비가 대비전에 문후를 드릴 때는 금박스란치마에 당의를 입고 삼작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또 철에 따라 오월 단오부터는 백옥‚ 비취로 된 외줄노리개를 팔월 추석부터는 삼작노리개를 찼다고 한다. 왕비만이 찰 수 있었다는 삼천주 노리개는 불교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주 큰 진주를 셋씩 꿰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주로 은삼작을 찼으며 혼례 때 사용하고는 백지와 비단보에 싸서 상자 속에 간직해 두었다가 친척의 혼인 때 꺼내 썼다고 한다. 이렇게 궁중과 상류사회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 애용되었던 노리개는 친가와 시부모로부터 예물로 받고 다음에는 자녀들에게 물려 주었으므로 대를 잇게 마련이었고 가보로 여겨졌었다. 또한 노리개를 패용하는 정신적인 배경에는 부귀다남‚ 불로장생‚ 백사여의(百事?意) 등 그 시대의 행복관을 바탕으로 한 염원이 내포되어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노리개는 고름에 거는 부분인 띠돈‚ 끈‚ 주체가 되는 패물‚ 매듭‚ 술로 구성된다. 띠돈은 주체가 되는 패물을 연결한 끈을 한곳에서 정리하기 위해 만든 고리로 고름에 걸게 되어 있다. 또 주체가 되는 패물은 한개 또는 세개를 다는데‚ 한개로 된 노리개는 단작노리개‚ 세개가 한 벌로 된 노리개는 삼작노리개라 하였다. 매듭은 주체를 중심으로 상하에 있어 주체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의 구실을 하는 것이며 그 밑에는 술이 달려 있다. 매듭과 술은 홍?남?황의 삼원색으로 기본색으로 하며 분홍?연두?보라?자주?옥색 등을 사용하는데 그 크기는 노리개에 다는 패물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노리개에 사용된 술의 종류로는 딸기술‚ 봉술‚ 끈술‚ 방울술이 있다. 본 박물관의 이 유물은 삼작노리개로 패물은 투호 항아리 모양의 은제 패물이다. 투호는 옛날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청동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넣어 많이 넣는 편이 이기는 놀이다. 이 패물에는 도안화된 수(壽)자와 복(福)자와 꽃무늬가 각각 새겨져 있다. 술은 노랑‚ 초록‚ 붉은색의 방울술이다. 방울술은 주로 남자용 선추 끝에 다는 것으로 납작하게 짠 12絲로 연봉매듭을 맺고 그 끝을 금실이나 배색이 잘되는 색실로 감는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노리개(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