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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복자문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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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백자복자문식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국 ·숭늉 등을 담을 때 쓰는 백자식기. <유래 및 발달과정> 백자는 순백색의 태토(胎土) 위에 투명한 유약(釉藥)을 씌워서 번조(燔造)한 자기로서 우리나라는 신라말경부터 청자와 함께 백자도 번조하였다. 이때의 백자는 기벽이 얇은 편이며 유약도 얇은 편이고 유빙렬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으며 발색은 베이지색을 머금은 것과 푸르름을 머금은 것이 있다. 이후 10세기경까지 고려백자는 해무리굽 백자가 소량 생산되었다. 기벽은 초기보다 두껍고 유약에는 대체로 미세한 빙렬이 있으며 환원번조되어 푸르름이 감돈다. 11세기 백자는 그 전보다 퇴화하여 초기 백자보다 자화되지 않았고 태토는 마치 잡물이 섞인 거친 석고와 같다. 유약은 얇게 시유되었고 태토와 유약이 서로 밀착되지 않고 유약이 떨어져나간 예가 많다. 12세기 백자는 태토와 유약이 11세기 보다 발전하여 기형이 세련되고 태토도 자화가 이루어지고 유약도 용융상태가 양호하다. 13세기와 14세기 전반까지 백자도 고려청자와 같은 퇴보를 보이고 수량도 더욱 줄어든 상태였다. 14세기 전반에 중국의 경덕진에서 원대 청백자가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추부백자가 등장하는 것과 연관이 있는 듯 고려에서도 새로운 백자를 생산하였다. 기벽과 유약이 두껍고 표면발색은 푸르름을 머금고 있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국초부터 백자의 생산과 관리에 힘을 기울였다 조선조 백자는 처음 경기도 광주와 관악산‚ 북한산 등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점차 지방으로 확산되었으며 광주는 중앙관요로서 조선 백자가마의 핵심이었다. 문양에 있어서는 조선 전기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순백자가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로 갈수록 기형(器型)이 다양해지기 시작하면서 청화‚ 철회‚ 진사 등 다양한 안료로 그림을 그려넣었다. <일반적인 형태와 특징> 이 유물은 내저면에는 복(福)를 청화로 썼고 바깥면의 구연부와 굽도리에는 청화로 선을 둘렀고 구연부에는 금분으로 색을 칠했던 듯 흔적이 남아 있다. 몸체에는 청화와 진사로 밤‚ 붉은색의 열매‚ 풀무늬 등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곳곳에 금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백자(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朝鮮白磁』Ⅱ(호암미술관‚ 1985) 『朝鮮白磁展』Ⅲ(호암미술관‚ 1987)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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