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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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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왕죽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김진우(金振宇)가 그린 묵죽도(墨竹圖). <작가설명> 일주(一?) 김진우(金振宇‚ 1883-1950)는 광복지사이자 근대 사군자 화가이다. 본관은 강릉으로 부친인 준경(駿卿)과 모친인 전주이씨(全州李氏)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론학맥을 계승하면서도 조부 연긍(演兢)의 외가인 영월신씨(寧越辛氏) 집안로부터 받은 삼연계(三?係)의 진경문화 의식에 영향을 받아 그가 묵죽의 대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된다. 또 김진우는 삼연학파(三?學?)의 수장이자 항일운동가였던 의암(毅庵)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의 제자였는데‚ 이로 인해 김진우가 평생 서화에 잠심(潛心)하여 서화‚ 특히 묵죽의 대가가 되었고 일제 식민통치기간 내내 항일광복정신을 잃지 않고 투쟁해 나갔던 것이다. 의암의 의병활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진우는 의암을 따라 만주와 연해주를 전전하다가 의암이 죽자 귀국하였다. 귀국후 잠시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안중식과 조석진 등이 이끄는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에 빈객(賓客)으로 출입하여 그 기량을 연마하였다. 또 중국대륙 각처를 여행하며 역대 진적을 임모하거나 명인대가들을 만나 배움으로 인해 서예와 사군자에서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919년 삼일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활약하다가 국내 거점 확보의 밀명을 받고 신의주로 잠입하여 서울로 들어오려다 신의주 경찰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고 3년징역형을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묵죽에만 전념하게 된다. 김진우는 감옥에서도 서법을 연마하여 출옥하였을때는 일문을 이룰만한 독특한 기법을 터득하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그의 묵죽은 병장기처럼 살기 등등하게 표현되는데 속필(速筆)과 화선지의 번짐을 이용하여 발묵(潑墨)‚ 파묵(破墨)의 묘를 도출해냈다. 김진우는 민족문화의 엄연함을 보여주기 위해 조선미술전람회에 글씨와 묵죽을 출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지속되자 김진우는 붓을 꺾고 일체의 사회활동을 포기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좌우의 이념대립으로 인해 6.25전쟁이 일어났고 또 未渡江? 저명인사로 조사대상이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작품설명> 김진우의 작품을 살펴보면‚ 감옥에 들어가기 전인 40대 이전에는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풍을 따르고 있고 이후의 작품에서는 청대(?代)의 정섭(鄭燮‚ 1693-1765)이나 신위(申緯‚ 1769-1847)류의 일격 묵죽화풍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본 박물관의 왕죽도(?竹圖)는 화면 중앙에 대나무를 그렸는데‚ 입체감이 두드러진 굵은 대나무 줄기와 칼날같이 날카로운 대나무잎이 특징이다. <참고문헌> 『澗松文華』40집(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9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진우(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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