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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미도등대 등명기 실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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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팔미도등대 등명기 실도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팔미도등대 등명기의 실도면이다. <발달과정/역사> 제작자·제작년도 미상. 여러 항로표지 시설 중에서 광파표지는 음파표지와 함께 그 사용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최근에는 첨단기술을 이용한 전파표지가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광파표지는 항해자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빠르게 선박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중요성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팔미도 등대는 인천시 중구 무의동 산 374번지 (N : 37°21.3′‚ E : 126°30.7′)에 위치하였으며 최초 점등일은 1903년 6월이다. 19세기 말 당시 우리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은 다투어 이양선(異樣船)을 몰고 와 개항장 인천을 찾았다. 그 이유는 인천에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거점을 확보하여 각종 이권을 손아귀에 쥐려고 획책했던 것이니‚ 팔미도는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던 바다의 이정표(里程標)였던 것이다. 이 점에 먼저 눈독을 들인 나라가 일본이었다. 1901년 침탈의 야욕을 불태우던 일본은 개항되던 해 우리 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通常章程)"에 "한국 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各 港)을 수리하고 등대(燈臺)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고 한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강권하고 있었다. 등대의 효용성을 모를 리 없던 정부였으나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했다. 결국 정부는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涇關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등대와 북장자서‚ 백암등표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등명기는 가스 또는 전구를 사용한 광원에서 나온 빛을 렌즈 또는 반사경을 이용하여 굴절 반사시켜 빛을 모아 외부로 방사하는 조명기구이다.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는 항해자가 원할 때마다 선박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연안을 항해하거나 입출항할 때에는 섬이나 곶‚ 산봉우리와 같은 육상의 뚜렷한 목표를 이용할 수 있지만‚ 적당한 목표가 없거나 야간에는 인공적인 항로표지 시설을 설치하여 항해를 도와야 한다. 여러 항로표지 시설 중에서 광파표지는 음파표지와 함께 그 사용 역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최근에는 첨단기술을 이용한 전파표지가 많이 사용되고 있지만‚ 광파표지는 항해자에게 가장 직접적이고‚ 빠르게 선박의 위치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아직까지 그 중요성이 빛을 잃지 않고 있다. 광파표지의 핵심 장비인 등명기는 등부표에서 육지 초인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광달거리 5 마일 이하의 소형에서부터 광달거리 25 마일 이상의 대형까지 다양한 종류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총 8개 이상의 국내외 제작사로부터 공급된 21종의 다양한 모델이 공급되어 설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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