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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해라
- 저작물명
-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해라
- 저작(권)자
-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 출처
- 공표년도
- 창작년도
- 2015-01-23
- 분류(장르)
- 사진
UCI 로고
- 요약정보
- 명칭: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해라 유물번호:180058 분류:지류 크기: <정의> 김우진 비평 <이광수류의 문학을 매장해라>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비평에서 김우진은 계몽적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세부사항> *김우진(1897-1926. 극작가. 호는 초성) 전라남도 장성 출생. 장성군의 관아에서 군수의 장남으로 대어나 7살 때 생모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하며 철저한 유교교육을 받았다. 대지주인 엄부의 명에 따라 일본구마모토 현립 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나 그 후 부친의 의사를 무시하고 1919년에 와세다 대학 예과에 입학해 영문과에 진학하였다. 매우 허약하고 내성적이며 사색적이었던 그는 18살 때부터 시작을 하여 원래의 희망 이였던 시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와세다대 입학 후에는 종합예술인 연극공부와 창작에 몰두하였다. 1920년 봄 ‘극예술협회’를 조직하여 재일 노동자 단체들의 모금운동을 도왔고 최초의 소인극 단체 ‘동우순회극단’을 조직‚ 운영‚ 번역‚ 연출하여 전국 주요도시에 새로운 연극의 씨앗을 뿌렸다. 창작희곡으로는 <정오>‚ <이영녀>‚ <두더기 시인의 환멸>‚ <난파>‚ <산돼지> 등 다섯 편이 있고‚ 번역 희곡은 미필고로 쇼의 <워렌부인의 직업>이 남아 있다. 나체와 마르크스로부터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들은 주로 전통적인습의 거부‚ 여성의 경제적·사회적 문제제시‚ 생명‚ 죽음‚ 신‚ 이상 등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 등을 다루었다‚ 1924년 와세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한 그는 고향인 목포에 내려와 한동안 가업을 이어 상성합명회사 사장으로 지냈으나‚ 윤심덕과의 사랑과 무미건조한 재산관리사무로 자신의 내적 고민을 견디기 어려워 1926년 집을 나와 모든 인습과 전통을 버리고 동경으로 건너갔다. 평소에 말이 적고 대단히 이성적이었던 그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한 원인은 분명하지 않지만‚ 그들의 죽음은 세간의 대단한 화제 거리였다. 시대적 압력에 의한 절망‚ 인습을 거부한 사랑의 고뇌로 짧은 생애를 독특하게 마감하였지만‚ 그는 ‘20년대 초의 신극 운동의 선구가’로‚ ‘신파극 시대에 최초로 서구 근대극을 제대로 연구하고 쓴 작가’이며 ‘우리 연극사‚ 문학사에서 가장 진지하게‚ 자신의 삶과 예술적인 창작 의욕을 희곡장르를 통해 본격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최초의 극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전라남도·전남대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2002 / 한국극예술학회‚ “한국현대 극작가론-김우진”‚태학사‚ 1996
- 저작물 파일 유형
- 저작물 속성
- 1 차 저작물
- 공동저작자
- 1유형
- 수집연계 URL
- http://www.emuseum.go.kr
- 분류(장르)
- 사진
- 원문제공
-
원문UR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