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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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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김성규 사진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태리 전권공사관 서기관 근무시 홍콩에서 찍은 사진 (당시26세) <세부사항> *김성규(金星圭‚ 1863(철종14)-?) 조선말기의 문신학자. 자는 찬형‚ 호는 초정(草亭)‚ 운빈‚ 안동 김씨이다. 경북 문경지역에서 세거하다가 조부 석근 대에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석룡리에 이주했다. 아버지 병욱(炳昱)은 연풍(延豊: 현 충북 괴산군) 현감(縣監)을 역임했는데‚ 그곳에서 김성규는 출생했다. 모친은 전주 이씨이며‚ 가학으로 유학을 공부하다 뒤에 서울에 올라가 수학했다. 그는 25세 때인 1887년(고종24년)에 광무국주사겸친군우영문안(光務局主事兼親軍右營文案)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아갔다. 그 후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 5국 전권공사관의 서기관으로 부임하려다 홍콩에서 청국에 의해 저지받아 되돌아왔다. 그 후에도 여러 관직을 맡았으나 특히 1894년 고창현감‚ 1897년 장성군수‚ 1899년 전라남도 양무감리(量務監理)‚ 1903년 무안향감리 등으로 활동할 때 수많은 공문서를 문집에 남겨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옴으로써 19년간의 관직생활을 마쳤다. 그의 3남 7녀 중 장남은 우진(祐鎭)으로서 가수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서 자살하는 비운을 겪기도 했다. 그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전통관료에서 계몽적인 관료로 전환하는 사례를 잘 보여준다. 한편‚ 그는 1934년에 ‘초정거사묘자지(草亭居士墓自誌)’를 썼는데‚ 그의 문집 《초정집(草亭集)》에 실려있다. 《초정집(草亭集)》에는 수리‚ 재용‚ 양전 등 경세책 외에도 동학과 삼일운동에 관한 그의 견해가 반영된 여러 저술이 담겨있어서 크게 참고된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 전라남도·전남대호남문화연구소‚“전남향토문화백과사전”‚ 2002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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