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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엽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일제시대 목포의 모습을 담은 엽서 <일반적형태 및 특징> 일제시대 목포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엽서로 이 엽서는 목포면화집산상황의 모습이 담겨있다. <세부사항> *시대적 배경 일제시대 목포는 1910년 무안부를 개칭하여 목포부라 칭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다시 무안군과 목포부를 분리함으로써 별도의 목포부가 처음으로 독립되었다. 이해 서울~목포간 호남선 철도 전구간이 개통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해 4월에 박상렬(朴相烈)·상술(相術)·상오(相五) 형제와 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이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1934년 김기진(金基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32년 무안군의 이로면 지역을 병합했으며‚ 당시의 인구는 6만으로 전국 6대 도시의 하나로 급성장하였다. *면화거래 1905년부터 1911년에 이르기까지 육지면의 시험재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통감부는 이를 한국 농민들에게 재배하도록 권장하였지만 이에 호응하는 농민은 극히 드물었고‚ 이에 헌병을 동원해서까지 육지면 재배를 강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1910년 이후에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면작(棉作) 제1기 계획을 수립하여 이후 6년 동안 면작을 10만 정보까지 늘리기로 작정하였다. 이에 따라 1912년 3월 데라우치 총독은 「면작장려에 관한 훈령」을 남한 6도 및 권업모 범장에 발하여 육지면의 재배 확장을 통해 일본의 면화수요를 충당할 것을 기하였다. 이에 따르면‚ 육지면 장려사업은 모두 각 도에 미루고‚ 모범장은 주로 시험 · 조사 등만을 맡도록 하였다. 이 계획이 대체로 달성되자‚ 총독부는 1919년 제2기 10개 년 계획을 세워 경작면적 25만 정보‚ 생산목표 약 2억 5천만 근을 설정하였다. 총독부의 면작 장려는 실제로는 장려가 아닌 강제로 이루어졌다 면작장려계획에서 재배지 확대 외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면작 조합을 설립한 것이었다. 1912년에 전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면작 조합은 면화의 공동판매‚ 종자 · 비료 · 농구의 공동구입‚ 육지면 종자의 채집‚ 자금융통의 알선 등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면작 재배 농민들은 이제 중개인이 아니라 오로지 면작 조합만을 통해서만 면화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다. 육지면은 원래 채종(採種)의 필요상 한국면업주식회사에 한해 매수의 특허를 주어왔다. 그런데 그 후 육지면의 증가와 반비례하여 재래종은 감소한 결과‚ 이 제도는 일반 업자의 이해에 깊이 관련되어 1912년 가을 총독부측은 자유판매제를 일시 허용했다. 이에 에 따르면 결국 목포에서는 조면공장을 가진 조선면업회사만이 매수자가 될 수 있었다. 실업 위기에 처한 목포부내의 70여명의 중매업자들은 목포면업회사라는 것을 창립하여 1913년 12월 1일 개업함으로써 매수인의 대열에 설 수 있었다. 이 시기 목포에서 매수인은 조선면업‚ 청평면업‚ 목포면업 3개 조면회사 밖에 있을 수 없었다. 많은 면화거래인들은 이 매수인 지정에서 배제되었고‚ 결국 상인들의 불만이 다시 팽배해져 1918년 면화취급규칙이 개정되어 매수인 지정제도가 폐지되었다. 이 개정의 요점은 면화 매수인의 자격을 완화하고 혼면 방지를 위한 조치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매수인이 급속히 증가했으며‚ 상인들이 면화를 매우 낮은 가격에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사들이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면화취급규칙이 다시 개정되어 매수인에게 매수 구역을 지정하고 도지사가 허가하는 방식과 함께 밀매를 강력히 단속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렇지만 공동판매제는 여전히 면화 매수인을 조면공장 소유자로 국한하여 일방적인 특혜를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면화경기가 호황기를 맞은 1920년대 초에는 많은 사람들이 매수인으로 지정 받기를 원했다. 1922년에는 매수인 170명‚ 매수대리인 58명이었는데‚ 1923년 한 해에 신청자가 500여명에 달했고‚ 이 가운데 매수인 81명‚ 매수 대리인 115명이 허가를 받았다. 또 1922‚ 23년경의 호황시에는 조면공장이 2‚ 3개 더 들어섰고‚ 1920년대 말에는 이를 따르는 자들이 속출하여 30여 개의 조면공장이 들어섰다 <참고문헌> 목포개항백년사‚ 1997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따라 면화시장은 일시 활기를 띠었으나‚ 일부 소수의 중매인들 가운데 재래면을 육지면에 섞어서 팜으로써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른 바 혼면(渗棉)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이에 1912년 11월 전라남도 당국은 도령(道令)으로써 면화취급규칙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후 면화매수인은 허가를 받은 소수로 한정하였고‚ 규칙을 위반하는 자는 100원 이하의 벌금 또는 구류 등에 처하도록 하였다. 이에 시장은 정체되고‚ 상인들의 불만은 비등하였다. 결국 총독부는 각 군에 면작 조합 및 공동판매소를 설치하고 이 곳에서 중매인을 거치지 않고 조면공장 소유자에게 직접 매도하도록 하는 대신‚ 표준시세를 정하여 구매토록 하였다. 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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