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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블 축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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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포터블 축음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원반(圓盤)에 홈을 파서 소리를 녹음하고 바늘을 사용해서 이것을 소리로 재생시키는 장치 <일반적 형태 및 특징> 1920년대 중반부터 1950년대 초반까지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이동형 축음기다. (VICTOR 축음기) <세부사항> *축음기의 역사 흥선대원군 집정 시절인 1866년 쇄국 조선에 통상을 강요해온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있었다. 아산 만에 정박한 오페르트가 통상을 위한 미소책으로 해미현감과 관원들을 선상으로 초대해 잔치를 베풀었다. 포도주와 양식으로 대접 받는 그 자리에 이 해안을 지키는 조선군 한 대령이 끼여 있었다. 오페르트는 서양문명을 자랑하여 기를 죽이려고 축음기를 틀었다. 현감은 눈을 감고 못들은 체 은인자약 하는데 대령은 멈칫 몸을 피한 것은 잠깐이요 흘러나온 노래에 맞춰 춤을 추었다. 서양노래에 조선춤인지라 우습기 짝이 없었다고 오페르트는 적고 있다. 이것이 한국인의 축음기와 의 최초의 만남인 것이다. 이 오페르트가 갖고 왔던 축음기는 그 연대로 미루어 1857년에 영국인 리온 스코트가 발명했다는 축음기일 확률이 높다. 그런 축음기 해프닝이 있은지 31년 후인 1897년의 일이다. 당시 미국 공사이던 앨런이 미국으로부터 축음기 한대를 도입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불러모은 가운데 이를 틀었다.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피난정치를 끝낸 지 얼마되지 않은 때인지라 친로파 인사가 많았다. 외부대신인 조병식과 친로 세도로 주름잡던 김홍륙도 그 중에 있었다. 당시의 축음기는 원반형으로 된 레코드가 아니라 1877년에 에디슨이 발명한 원통형으로 현장 녹음과 재생이 가능한 축음기였다. 연회식이 벌어진 그 식장에서 앨런이 환영사를 하고 난 뒤 한국측에서는 대신 한 사람이 답사한 내용을 이 축음기에 녹음하여 놓았다가 재생을 한 것이다. 처음 보는 이 흉내내는 기계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색다른 물건은 마음을 홀리는 요물이기에 그것을 보고 듣고도 마음을 동요해서는 안된다는 유교의 가르침에 투철한 분들인지라 이를 틀어 놓아도 짐짓 건기침을 하거나 돌아앉거나 천장을 올려보고 일부러 못들은 척 했던 것이다.이 신기한 외래문물을 둔 부동심이야말로 신앙에 가까운 한국의 도덕수준을 말해 주는 것이라고 앨런 공사는 감탄하고 있다. 이 한국 최초의 축음기와 동형의 것이 우리 나라 참소리 축음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원통형 실린더에 2∼6분 동안 녹음 재생되는 「딕타폰」임을 알 수 있다. 말과 소리를 비축했다가 이를 재생한다 하여 사음기‚ 축언기‚ 자음기‚ 소언기‚ 유성기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이경호의 축음기홈페이지 / 참소리축음기에디슨 박물관 <유사관련용어> LP음반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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