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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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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정자관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3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조선시대 사대부와 유생들 사이에 유행한 관모의 하나이다. 원래 당건(唐巾)이라 하여 중국제 관모의 하나였다. <역사> 중국에서는 정자건이라고 하는데‚ 북송의 대유학자인 정호(程顥 : 1032∼1085)·정이(1033∼1085)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명종(明宗)조 이제신(李濟臣)의 청강쇄어에 "벼슬아치들이 평상시에 갓 대신 관을 쓰기를 좋아하였다. 그 관의 제도는 程子式·朱子式·東坡式·正式·方巾 등이 있어 종류가 매우 많았다 한다."는 기록이 있고‚ 이들 관은 모두 유가(儒家)의 관으로 유생들은 각자 개성에 맞는 관을 선택하여 즐겨 썼다고 한다. 정자관은 주로 조선 말엽의 기록 중에 나타나며‚ 그 사용 예도 조선 후기에 한한다. 사실 조선 말엽의 정자관은 명칭만은 정자(程子)의 이름에서 연유되었으되 동파관(東坡冠)이 변화하면서 생겨난 조선조 특유의 관모이다. 즉 동파관의 형상이 내장(內墻)과 외장(?墻)의 차가 크고 좌우가 크게 벌어져 원래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게 변화함으로서‚ 좌우로 크게 벌어진 내장과 외장의 사면이 수식적으로 운상(雲狀)을 그리는 말기의 정자관 형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현재 유품들을 보면 정자관의 재료는 모두 말총이다. 대개 사대부들은 평상시에도 갓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예의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면서 갓 대신 맨 상투바람을 면하는 것에 충당하게 된 것이 이 관의 기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집안에서만 착용하도록 되어 있던 것이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정자관은 사각형의 높은 내관에 밖에 다시 `산(山)`자형 혹은 파상(波狀)의 수(收)를 2단 혹은 3단으로 덧붙여 처리하였기 때문에 2층 정자관‚ 3층 정자관이라는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전후좌우 봉우리의 기복이 심하며 위가 트였으며‚ 특히 조선 말기의 정자관은 우리 식으로 바꾼 것이다. 애초에 망건을 쓰고 다시 탕건을 쓰고 그 위에 덧쓰는 것으로 재료는 말총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말총(馬尾)이 흑색(黑色)이 아니기 때문에 관을 만들 때는 엮을만한 분량을 칠(漆)에 담가 흑색으로 착색된 말총을 한 올 씩 뽑아 엮었다. 다른 편복(便服) 관이나 마찬가지로 실내나 가정에서 갓을 쓰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하여 썼다. 지위가 높을수록 층이 많은 것을 썼으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으면서 돈 바치는 이에게는 명칭만이지만 모조리 관직을 주었기 때문에‚ 그네들이 다투어 3층관을 써서‚ 세간에서는 3층관을 오히려 ‘쌍놈관’이라 하였다. 한말 신흥종교 교주의 초상에는 네 겹도 있어 여기에는 정식이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정자관은 2층 정자관으로 판을 따로 짜서 연결했으며 앞뒤 중심선을 파이핑처럼 처리하여 힘을 받게 했다. <참고문헌> 민족생활어 사전(한길사‚ 1997)‚ 조선시대 우리옷(현암사‚ 1998)‚ 복식류명품도록(고려대학교‚ 1990)‚ 한국복식2천년(국립민속박물관‚ 1997)‚ http://www.nfm.go.kr/folk/main.jsp(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정신문화연구원)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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