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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인화문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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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분청사기인화문대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4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회색 또는 회흑색 태토(胎土) 위에 백토니(白土泥)를 분장한 다음 유약을 입혀서 구워낸 자기. <발달과정/ 역사> 14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세종연간(1419∼1450)을 전후하여 그릇의 질이나 형태 및 무늬의 종류‚ 무늬를 넣는 기법[施文技法] 등이 크게 발전·세련되어 그 절정을 이루게 됨으로써 조선 도자공예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경기도 광주 일대에 백자를 생산하는 관요(官窯)가 운영되면서 왕실과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자기의 공급은 광주분원(廣州分院)에서 맡게 되자 관장제수공업체(官匠制手工業體)로서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분청사기의 생산은 점점 소규모화되면서 민간용을 주로 생산하게 되었다. 더욱이 중앙관요의 영향이 지방으로 파급되면서 백자의 생산이 계속 증가되었으며‚ 16세기 중엽 이후에는 분청사기의 생산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백자만이 남아 조선시대 도자기의 주류가 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비교적 높고 좁은 굽에서 뻗어 올라간 기벽은 반원형이며 끝부분에서 45도 정도로 외반되며 구연부를 형성한 대접이다. 특히 외면에는 귀얄을 이용하여 빗질을 한 뒤 유약을 입힌 상태로 굽의 일부에는 유약이 전혀 묻지 않았다. 안쪽은 입술 바로 아래에 초문대를 돌리고‚ 그 아래에 다시 우점문을 꽉 차게 배치하였다. 바닥부분과 기벽면의 구분이 되지 않게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바닥을 형성하는데 정 중앙에 국화문을 한 개 그리고 그 주위에 여섯개를 배치한 뒤 세 줄의 음각선문대를 돌린 뒤 여기에 연결해서 연판문대를 한 줄 돌렸다. 따라서 내면은 외면과는 달리 문양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개정용어집>>‚ 한국고고미술연구소‚ 198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박물관도록>>‚ 대전대학교박물관‚ 2000 <<숭실대학교박물관도록>>‚숭실대학교박물관‚ 2004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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