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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숲데미산 유류품 : 버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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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다부동 숲데미산 유류품 : 버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6.25전쟁 중 다부동 전투(1950. 8. 3~9. 22) 지역의 숲데미산에서 발굴된 버클 <발달과정/역사>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한 전사자 유해발굴 과정 중 다부동 전투(1950. 8. 3~ 9. 22)지역의 숲데미산에서 발굴된 버클이다. 정부는 6.25전쟁으로 산화한 참전용사의 높은 뜻을 기리고 넋을 추모하기 위해 200년 45월부터 유해발굴을 시작하였다.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경북 다부동‚ 경기도 용문산‚ 강원도 양구.화천 증지에서 지금까지 3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 다부동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한 직후부터 반격으로 전환할 때까지‚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이 대구 북방의 왜관과 다부동 일대에서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군단(제.제13.제15사단)의 8월 공세와 9월공세를 저지한 방어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과 다부동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북한군 3개 사단(제3.제13.제15사단)과 25일 동안의 교전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북한군의 8월 공세를 저지한 후 미 제1기병사단에게 진지를 인계하고 신녕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진지를 인수한 미 제1기병사단은 다부동과 지천‚ 도덕산 일대에서 북한군 2개 사단(제3.제13사단)과 23일 동안의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북한군의 9월 공세를 저지하고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국군과 유엔군은 함께 반격작전을 하게 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가죽의 대부분은 없어지고 쇠로 된 버클과 약간의 가죽만 남아있다. * 다부동전투(太富?戰鬪) : 낙동강방어선 전투 중국군 제1사단이 대구 북방 다부동에서 미군과 더불어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한 전투. 낙동강방어선 가운데 대구 북방 22km에 위치한 다부동은 대구방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술적 요충지로서‚ 만일 다부동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형상 아군은 10km 남쪽으로의 철수가 불가피하고‚ 대구가 적 지상화포의 사정권내에 들어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은 다부동 일대에 증강된 3개 사단을 투입‚ 약 21‚500명의 병력과 T-34전차 약 20대(후에 14대 증원) 및 각종 화기 약 670문으로 필사적인 공격을 해왔다. 이에 반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1사단은 보충 받은 학도병 500여 명을 포함‚ 7‚600여 명의 병력과 172문의 화포 등 열세한 전투력을 극복하면서 공산군의 이른바 8월 총공세를 저지하여 대구를 고수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미 제1기병사단과 임무를 교대하였다. 미 제1기병사단은 공산군의 9월 공세로 한때 국군 제1사단이 사수했던 다부동일대의 주저항선을 적에게 붕괴 당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개시된 낙동강방어선에서의 총반격으로 다부동을 탈환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架山面) 다부리 유학산(遊鶴山) 기슭에는 국군 제1사단의 정공을 기린 다부동전적비가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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