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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화 :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지킨 임경업(林慶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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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기록화 :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지킨 임경업(林慶業)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28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1634년(인조 12) 임경업(林慶業)장군이 청나라 군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고 민병대(民兵隊)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린 기록화 <발달과정/역사> 임경업은 본관이 평택(平澤)‚ 호는 고송(孤松)‚ 자는 영백(英伯)‚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충주에서 출생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무과에 급제‚ 1620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 1622년 중추부첨지사를 거쳐 1624년(인조 2) 정충신(鄭忠信) 휘하에서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1등이 되었다. 그 후 우림위장(羽林衛將)·방답진첨절제사(防踏鎭僉節制使) 등을 지내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좌영장(左營將)으로 강화에 갔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30년 평양중군(平壤中軍)으로 검산성(劒山城)과 용골성(龍骨城)을 수축하는 한편‚ 가도(島)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劉興治)의 군사를 감시‚ 그 준동을 막았다. 1633년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으며‚ 공유덕(孔有德) 등 명나라의 반도(叛徒)를 토벌‚ 명나라로부터 총병(總兵) 벼슬을 받았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방어사를 겸임할 때 포로를 석방했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1636년 무혐의로 복직되었다. 같은 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백마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의 진로를 차단하고 원병을 청했으나 김자점(金自點)의 방해로 결국 남한산성까지 포위되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 군대를 치기 위해 병력을 요청하자 수군장으로 참전했으나 명나라와 내통‚ 피해를 줄이게 했다. 1640년 안주목사(安州牧使) 때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 주사상장(舟師上將)으로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 다시 명군과 내통하여 청군에 대항하려다 탐지되어 체포되었으나 금교역에서 탈출했다. 1643년 명나라에 망명‚ 명군의 총병이 되어 청나라를 공격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이 때 국내에서 좌의정 심기원(沈器遠)의 모반에 연루설이 나돌아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청나라에서 송환되어 친국(親鞫)을 받다가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刑吏)에게 장살(杖殺)되었다. 1697년(숙종 23) 복관(復官)되어 충주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신영상(辛永常)이 그렸다. <제원> 가로 291cm‚ 세로 197cm * 정묘호란(丁卯胡亂) : 1627년(인조 5) 만주에 본거를 둔 후금(後金:?)의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후금 사이의 싸움.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향명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 ?평산(平山)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란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劉涇)를 강화도에 보내 ① 명나라의 연호 ‘천계(?啓)’를 쓰지 말 것‚ ②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③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 충렬사(忠烈祠) :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에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부산에서 순절한 호국 선열의 위패를 모신 사당. 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1627년 l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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