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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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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첩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천릭(?翼)은 조선시대 문무관리들이 외국사신으로 파견될 때나 국난을 당했을 때 또는 왕이 행차시 옆에서 호위할 때 몸을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입었던 융복(戎服)이다. 이 천릭은 조선 초기에는 첩리(帖裏)‚ 첩리(帖裡)로 중후기에는 천익(?益)‚ 첩리(貼裏)로‚ 후기에는 천익(?翼)‚ 철릭으로 기록되었으며‚ 통칭 `철릭`이다. 천릭은 원래 단령 밑에 입는 받침옷으로 항상 입도록 하였는데‚ 이는 비상시 단령을 벗으면 옷을 갈아입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그 형태는 심의(渙衣)와 같이 의(衣)와 상(裳)이 붙어 있으며‚ 허리부분에 주름을 잡아 활동하기 편리하게 되어있다. 주름은 잔주름이나 넓은 주름이 사용되었다. 출토복식을 보면 의와 상의 비율이 초기에는 1:1이던 것이 점차 상의 길이가 길어져 후대에는 그 비율이 1:2 정도가 된다. 초기에는 겉섶이 옆구리까지 돌아가 깊게 여며지는데 비해 후기로 갈수록 여밈이 얕아진다. 이는 깃의 변천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조선초기에 천릭의 깃길이는 겨드랑이 밑 허리선에 닿았으나 점차로 깃이 올라가 짧아졌다. 본 유물은 1999년 12월 20일 전주(全州) 이씨(李氏) 정간공(靖簡公) 휘(諱) 익정(益炡 : 1699-1782)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한 것이다. 2002년 월드컵 경기장 건설과 함께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면서 이장(移葬)을 하게 된 것이다. 출토당시 관의 내부는 시신이 육탈(肉脫)되어 약간 내려앉은 상태였고 습기가 차 있었으며 악취는 약한 편이었다. 내관(內棺) 안벽에는 얇은 한지(韓紙)가 발려있었고‚ 추운 날씨때문에 유물은 서로 엉킨 채 얼어있는 상태였다. 유물의 상황을 판단하면서 시신의 상부를 덮은 것 중에서 머리 쪽에 있는 보공물(補空物)부터 걷어내었는데‚ 주로 옷·솜·옷감들이었다. 다음으로 수의(壽衣)를 수거하였다. 수의를 입힌 순서를 보면 겉으로부터 위는 심의→중치막→중치막→소창의→적삼‚ 아래는 솜바지→고의‚ 발에는 행전→버선→신을 신고 있었다. 머리는 복건 속에 명목을 덮고 한지로 얼굴을 가렸으며 옥관자(?貫子)를 단 말총(馬尾) 망건(網巾)을 쓰고 상투를 틀었다. 수의는 일단 뼈를 들어낸 후 수거하여 박물관에 돌아와서 정리하였다. 익정의 유물 중 천릭은 보공품(補空品)으로 들어간 1점 뿐인데‚ 운보문(雲寶紋) 단(緞)으로 만들었다. 상(裳)은 1.4cm의 주름이 잡힌 것으로 세자락이며 겉자락 135cm‚ 안자락 91cm‚ 뒷자락 180cm이다. 두리소매이며 진동에서 수구로 완만한 절구통형 곡선으로 연결되었다. 길이는 의(衣)에 비해 상(裳)이 길어져 조선 후기 천릭의 전형적인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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