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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김씨삼현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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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김해김씨삼현파보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이조 이십이대 정종대왕(서기 1777년)께서 김해김씨(金涇金氏)를 가리켜 삼한갑족(三漢甲族)이라 하시며 절효(극일)‚ 탁영(일손)‚ 삼족당(대유) 세현인을 가리켜 청도 三賢이라 하였으며‚ 한 집안에서 四代間에 三賢人이 났다는 일은 古來로 드문 일인고로 이로 인해 삼현파(三賢?)로 정하였다 한다. 계파는 금녕군파를 비롯한 142개파가 있으며 김유신의 직계종파인 3개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경파(京? - 영견‚ 영서‚ 영정‚ 영순)는 고려의 김목경(牧卿)을 중시조로 하고‚ 사군파(四君? - 극조‚ 완‚ 여수‚ 세기)는 목경의 동생 김익경(益卿)이 중시조로 하며‚ 삼현파(三賢? - 극일‚ 일손‚ 대유)는 김관(管)을 중시조로 한다. 삼현파(三賢? : 판도판서공파)의 일세조(一世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學校)를 건설하여 유학(儒學)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功)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孫) 극일(克一)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世宗) 때 문과(文科)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龍馬)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로 일컬어졌다. 1486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일손(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儒)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 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李克墩)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피게 되니 일손의 스승인 김종직 (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意帝文 :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 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이 목(李 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고‚ 김종직(金宗直)은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뒤 에 큰 죄가 드러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되었다. 일손(馹孫)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중종조(中宗朝) 영의정(領 議政) 남 곤(南 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 : 김일손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 수 있을 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개천에 지나지 못하다"라 고 일손의 짧은 생애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대유(?有)는 일손(馹孫)의 조카이며 준손(駿孫)의 아들이다.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숙부(叔父) 일손이 참수 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湖南)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 때 풀려 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道)의 운문산(雲門山) 속 삼족당(三 足堂)에서 73세로 일생(一生)을 마쳤다. 일손(馹孫)의 증손(曾孫) 언유(彦諭)는 고양(高陽)에 살면서 지극한 효행(孝行)으로 명망이 높았고‚ 시(詩)와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특히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여 공사(公私)의 비(碑)와 병풍·족자의 글씨를 많이 썼다. 언유(彦諭)의 아들 현성(?成)은광해 군(光涇君) 때 폐모론(廢母論)에 불참하여 면직되자 청빈하게 여생을 마쳤으며‚ 시·서·화에 모두 능했다. 1. 김수로와 함께 마지막으로 나온 김말로왕은 고성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2. 근원이 다른 김해 김씨가 있는데 임진왜란때 왜장 김충선이 조선에 귀화하여 성을 하사 받은 김해(우록) 김씨가 있다. 삼현파 조 관은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를 역임했고‚ 왕에게 간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으며‚ 조선에서는 그의 5세손 극일이 유명했다. 극일은 일찍부터 세종 때 조정으로부터 효자정문이 세워졌고‚ 그의 둘째아들 맹은 세종때 급제하여 집의를 역임했고‚ 맹의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올라 당대의 문장으로 이름을 날려 <김씨삼주>라 불리 웠다. 이 밖의 인물에는 심하(渙河)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조선의 명장 경서(景瑞)와 조선의 화가 중에 제 일인자로 꼽히는 홍도(弘道)가 있다. [운서(韻書)]를 깊이 연구하여 중국어(中國語)에 능통했던 덕승(德承)‚ 삼도 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예직(禮直)‚ 조선 풍속화의 조종(祖宗) 이유명했고‚ 충효정려(忠孝旌閭)를 사액(賜額)받은 진희(晋熙)와 <해동가요(涇東歌謠)>를 남기고 [청구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천택(?澤) 등이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김해 김씨(金涇金氏)를 빛냈다. <참고문헌> http://www.onebrothers.com/total_main.htm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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