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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교묘지발(尹顯敎墓誌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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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윤현교묘지발(尹顯敎墓誌鉢)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묘의 위치를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이다. 대체로 죽은 사람에 대하여 성명과 자(字)‚ 출생지‚ 선대계보‚ 출생년월일‚ 관직 약력과 부임지(赴任地)‚ 행적‚ 덕망‚ 사망일‚ 가족관계 등을 적는다. 일정한 형식이 없이 석곽‚ 석관‚ 항아리 등에 직접 새기기도 하며‚ 관 위‚ 광(壙) 속에 매장하기도 한다. 장례시 무덤에 묻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묘의 주인공이 누구이며‚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를 전하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다. 장례 때 무덤 앞에 광을 파고 묻는 것이라 하여 광지(壙誌)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지석(誌石)이라 부른다. 묘지 끝에 운문(韻文)이 첨가되면 묘지명(墓誌銘)이라 한다. 네모난 돌에 묘지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한대(漢代)부터이다. 그리고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어 광중에 넣기 시작한 것은 중국 삼국시대의 위(魏)나라일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나친 노동력과 물자의 낭비를 초래하는 석실.비석.석수(石?) 등의 석물을 금지하면서부터 비석 대신에 지석을 묻었던 것이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묘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고구려 때 벽화무덤인 동수묘(東壽墓‚ 서기 357년)와 5세기 중엽의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를 들 수 있다. 그리고 6세기 전반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 역시 같은 종류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석의 형태는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로 이어진다. 고려시대에는 석관에 직접 쓴 묘지나 네모난 검은 돌[方形 烏石制]에 쓴 묘지가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 이들은 묘지 끝에 운문을 첨가한 묘지명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는 묘지를 만들어 함께 매장하는 일이 일반화되었으며 묘지 끝에 운문으로 된 명(銘)은 많지 않다. 그리고 묘지의 재료로 돌과 함께 자기로 만든 것도 사용하기 시작하였는데 백자가 그 중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는 조선시대에 도자기 제작기술 발달로 인해 자기 지석이 자연석보다 제조가 용이하고 비용이 적게 들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내용을 기록할 수 있기 때문에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후대로 내려오면 자연석과 자기로 만든 지석 외에 석회나 흙을 네모진 조각으로 구워 만든 것들[土製]도 많이 나타난다. 또한 형태도 판형(板形)에서 대접형(?接形)‚ 사발형(沙鉢形)‚ 호형(壺形) 등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용기와 함께 원통형(圓筒形)‚ 묘비형(墓碑形)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판형묘지는 여러 매(枚)로 이루어져 있을 때 함 속에다 넣어서 묻기도 한다. 이 유물은 입부분이 넓은 사발 모양인 묘지발(墓誌鉢)어났다.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추증되었으며 경주이씨(慶州李氏)와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지석(誌石)-(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영원한 만남`한국상장례(국립민속박물관‚ 1990)‚ 한국민속대사전-지석(誌石)-(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1991)‚ 박물관 도록(청주대학교 박물관‚ 2000)‚ 명기와 묘지(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78)‚ 한국 민속의 세계(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1)‚ 사진으로 보는 가정의례(조선일보사‚ 1989) <사진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지석(誌石)-(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영원한 만남` 한국상장례(국립민속박물관‚ 1990)‚ 한국민속대사전-지석(誌石)-(한국민속사전편찬위원회‚ 1991)‚ 박물관 도록(청주대학교 박물관‚ 2000)‚ 명기와 묘지(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78)‚ 김태일소장 문화재도록-토기.도자기편-(온양민속박물관‚ 1992)‚ 도자기명품도록(고려대학교 박물관‚ 1989) <유사.관련용어> 지석(誌石)‚ 묘지석(墓誌石)‚ 광지(壙誌)‚ 묘지명(墓誌銘)‚ 장지(葬誌)‚ 지문(誌文)‚ 분기(墳記)‚ 광명(壙銘)‚ 곽명(槨銘)‚ 매명(埋名)‚ 묘명(墓銘)‚ 묘지명병서(墓誌銘竝序)‚ 귀부지(歸 誌)‚ 천부지(遷 誌)‚ 개석문(蓋石文)‚ 묘전기(墓 記)‚ 분판문(墳版 文)‚ 묘판문(墓版文)로 윤현교(尹顯敎‚ ?-1713)의 것이다. 묘지발 내부에 묘지의 내용을 먹(墨)으로 기록하였으나 거의 해독할 수 없다. 그러나 동생 윤언교(尹彦敎)와 윤면교(尹勉敎) 및 윤씨 집안 묘지(墓誌) 지문(誌文)을 통해 윤현교의 약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윤현교는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윤부(尹扶)와 나주 임씨(羅州林氏)의 아들로 태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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