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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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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장군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장군석은 죽은 이를 지키기 위하여 무덤 앞에 문인석(文人石)과 함께 세우는 사람 모습의 석조물이다. 무인석(武人石)이라고도 한다. 문인석이 문관(文官‚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손에는 홀을 가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반면‚ 무인석은 무인(武人)을 나타내며 갑옷을 입고 칼을 차거나 쥐고 있다. 우리나라의 무인석과 문인석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통일신라시대부터 왕릉에 나타난다. 무덤 주위에 문.무인석이나 돌짐승(石?‚ 사자‚ 말‚ 양‚ 호랑이‚ 소‚ 등)‚ 12지신상을 세우는 풍습은 중국의 전한시대(前漢代: 서기전 206-서기 24)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당나라에서 능묘제도(陵墓制度)를 받아들인 8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성덕왕릉.괘릉.흥덕왕릉의 문인석과 무인석을 들 수 있는데‚ 힘찬 조형성과 사실적인 신체묘사‚ 자연스러운 자세 등에서 당시 불교조각양식과 맥을 같이한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무인석은 사라지고 문인석 한 쌍만이 배치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고려 말기인 14세기 중엽의 충목왕릉에는 다시 문인석과 무인석이 함께 배열되기 시작하였다. 14세기 말의 공민왕릉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한 쌍씩 세우고‚ 돌사자(石?子)와 함께 돌양(石羊)이 무덤 주위에 배치되었다. 그 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문인석과 무인석은 계속 무덤 앞에 배열되지만‚ 점점 조각수법이 퇴화되고 형식화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머리가 더욱 커지는 반면 목과 허리는 표현되지 않고 하체도 짧아져 조각 작품이라기보다는 단지 상징적인 의례용으로 양식화되었다. 그 뒤 조선 후기인 19세기에는 잠깐이나마 전체적으로 길어지고 얼굴과 옷자락이 살아 움직이는 듯 표현되었다가 조선 말기에 이르면 서양 조각의 영향으로 사실적이고 개성이 강한 조각모습을 보여준다. 시대에 따른 문.무인석 조각양식의 변화는 능묘제도(陵墓制度)의 변천과 함께 우리나라 조각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석인(石人)‚ 능묘조각(陵墓彫刻)-(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우리 옛 돌조각의 혼(세중돌박물관‚ 2000) <사진자료> 우리 옛 돌조각의 혼(세중돌박물관‚ 2000) <유사.관련용어> 무인석(武人石)‚ 무석인(武石人)‚ 석인(石人)‚ 석인상(石人像)‚ 석수(石?)‚ 능묘제도(陵墓制度)‚ 능묘조각(陵墓彫刻)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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