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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덕면충효열유래행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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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근덕면충효열유래행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0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요> 근덕면의 대표적인 충신 효자(부) 열녀에 관한 유래를 기록한 책 <본문내용> 국난을 극복한 충신으로는 홍견‚ 효자로는 홍계하. 최연구. 김구정‚ 열녀로는 이광식의 처 심씨. 이주찬의 처 김씨를 선정하고‚ 그들의 행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경오 9월 근덕면 도훈 홍 유사 김치방‚ 안효순 *홍 견(? 堅) : 본관은 남양‚ 자는 강중(剛仲) 호는 도장(道庄)‚ 장사랑(將仕郞) 사웅(士雄)의 아들‚ 1568년(선조1) 별시무과(別試武科)에 급제하여 훈련봉사‚ 창덕국위장을 거쳐 1592년(선조 25) 임치첨사(臨?僉使)에 배명되어 임진왜란을 당하여 공로를 세웠다. 그후 고성포(高城?)‚ 아이포(阿耳?) 만호(萬戶)를 거쳐 전라 경상우도의 우후(虞侯)를 지냈으며‚ 타도진(陀渡?) 첨사(僉使)‚ 김해부사를 지냈다. 1605년(선조 38)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정되어 노비 은자(銀子) 면세마필(綿細馬匹) 및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다. 1610년(광해군 2)에 세상을 하직하니 나이 76세로 유사(遺事)가 남아있다. *홍계하(?啓?) :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옥(士沃)‚ 호는 해운정(涇雲亭)‚ 중겸(重鎌)의 자‚ 한택중(韓宅中)의 학문을 쫓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드려 병을 고쳤으며 조부님을 위하는 마음도 간절하여 조부님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할 때 부친이 계시니 자식으로 걱정이 되어 묘앞에서 살 수는 없고‚ 바쁜 걸음으로 돌아와 어버이를 섬겼으며 상중에 죽을 먹으면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 조부님이 병을 얻으니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호랑이도 감동되어 명약을 구하여 즉시 병이 나았다. 뒤에 할머니가 돌아가시니 손자로서 아버지가 안계셔 대신 복을 입고 시묘 3년을 마치고 아침 저녁으로 가묘에 알현하고 마음을 가라앉혀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예가 깊으니 그때 관동의 부자(?子)라 불렀으며 여러번 지방에서 과거에 응시할 것을 추천하였다. 순조(純祖) 19년(1882)에 정여문을 세워 표창하였으며 그의 유고를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펼쳤으며 매산(梅山) 홍직필(?直弼)이 글을 지었다. *김구정(金九鼎) : 본관은 삼척(三陟)‚ 근덕면 교가리에 살았으며 모친이 병환으로 누웠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넣어드려 병을 고쳤으며 선조왕이 승하하시니 3년 동안 상복을 입었고 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는 묘앞에서 시묘살이 하였는데 그 때 호랑이가 지켜 주었는데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 슬퍼하다가 몸이 쇠약하여 죽었다. 숙종(肅宗) 7년(1681)에 정여문이 내렸으며 통정대부로 추존되었다. 부사 박행의(朴行義)가 에서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체를 구하여 부지런히 집에 돌아오니 때는 엄동설한이라서 시체가 꽁꽁 얼어 녹지않아 14일간 밤낮으로 껴앉고 있으니 녹기 시작하였다. 함께 죽어 한무덤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배속에 아이가 있으니 그렇게도 못하고 기다렸다가 그 아이를 낳은 뒤에 죽으리라고 마음 먹고 조용히 장사를 치렀다. 뒤에 뜻을 취할려고 하니 집안에 "서리가 내린 이변(霜室之異)"이 있었다. 철종(哲宗) 5년(1854)에 열녀 표창이 내리고 증손 한익(漢翊)이 글을 지었다. <참고문헌> 삼척시지 글을 지었으며 영조(英祖) 14년(1738) 가을에 정효비(旌孝碑)를 고쳐 세운 뒤 만재(晩齋) 홍낙섭(?樂燮)이 "충효문(忠孝門)"의 세 글자를 써붙였으나 홍수로 비각이 유실되었으며 1959년의 대기근으로 고생할 때‚ 당시 면장 김진우(金眞禹)가 천주교 원조 옥수수를 받아 죽을 끓여가면서 땅을 파서 비를 찾아내어 정여각 안에 세웠다. *심소사(沈召史) : 본관은 삼척(三陟) 이광식(李光植)의 처로 교가리(交柯里)에서 살았다. 남편의 병이 깊이 들어 위독하니 신명이 감동하도록 정성껏 기도드렸으나 생일날 돌아가셨다. 철종(哲宗) 5년(1854)에 열녀 표창이 내리고 응교(應敎) 조석원(曺錫元)이 글을 지었다.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통정대부(通政??) 이주찬(李周粲)의 처로 교가리(交柯里)에서 살았으며 남편이 병으로 버드나무 밑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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