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토기 뚜껑

추천0 조회수 18 다운로드 수 0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토기 뚜껑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토기 뚜껑은 그릇의 몸체와 한쌍을 이루는 것으로 보통 몸체와 한조를 이루고 있으나‚ 따로 분리되어 발견될 경우 몸체를 찾기에 어려움이 있다. 일반적으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의 굽다리 접시와 합에 뚜껑이 있는 경우가 많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가야토기의 굽다리접시에 뚜껑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라토기란 삼국시대 신라지역에서 만들어 사용하던 토기이다. 지역적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방에 분포하고 있으나‚ 신라의 영토범위가 확장되면서 포괄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는 신라시대 경상도 지방에서 만들어진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 토기는 대부분 흑색 ·흑회색 ·회청색 등의 색조를 띠며 흡수성이 없고 표면이 단단하여 때리면 금속성이 나는데‚ 이는 밀폐된 가마에서 바탕흙[胎土] 속의 철분이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진 결과이다. 형태상으로는 목항아리[長頸壺]와 굽다리접시[高杯]가 기본이지만 이후 다양한 변형들이 등장한다. 이들 토기는 원삼국시대(김해시대) 말기인 250-350년에 와질토기(瓦質土器)에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단계에서 김해 부원동 패총에 잘 나타나는 ‘부원동기(府院?期)’를 거쳐 신라토기가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와질토기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소백산맥 이남에서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발전했는데‚ 낙동강 동쪽에서는 신라토기가‚ 서쪽에서는 가야토기가 각각 발전하였다. 신라토기와 가야토기는 같은 회색의 광택이 없는 토기로서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신라토기로 부르지만‚ 두 토기는 형태상 몇 가지 면에서 구분이 된다. 즉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구멍[透窓]이 위아래 한 줄로 배치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신라토기의 굽구멍은 위아래가 교대로 배치된 경우가 많으며‚ 몸통의 깊이가 깊은 편이다. 표면에 새긴 무늬는 신라토기 쪽이 보다 다양한 편이며‚ 굽다리접시에 딸린 뚜껑의 꼭지 형태도 차이가 있다. 목항아리의 경우 어깨 몸통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야토기는 매끄럽게 곡선으로 연결되는 데 비하여 신라토기는 단이 져 있고‚ 바닥에 대각(臺脚)이 붙어 있는 점도 다르다. 이 토기의 변천에 대해서는 전기 ·중기 ·후기 ·통일신라기 등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기는 350-450년으로 경주 황남동 109호분 ·110호분 ·98호분‚ 황오동 14호분 등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며‚ 경주 이외에는 부산 ·안동 ·예천 ·영일 등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이 시기에는 신라시대 대표적 고분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에 많은 양의 토기가 부장되어 신라토기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해식 적갈색의 창이 없는 굽다리접시가 소멸하고‚ 창과기하학적 무늬로 바뀌었다. 토기가 용기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떠나 외관에 중점을 두는 의기화(儀器化)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후기는 6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이전 시기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이 소멸하여 경주에 돌방무덤[石室墳]이 등장하고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증가하면서 고분에 부장되는 토기가 크게 줄었다. 형태상으로는 굽다리접시와 목항아리가 계속 주류를 이루고 있으면서 통일신라 토기로의 과도기적인 양식을 보이고 있다. 통일신라 시기에는 토기가 이전 시기처럼 고분에 일괄 부장되는 일이 드물어 토기자료가 극히 영세하다. 경주 이외의 외곽에서 간혹 나타나는 부장 토기와 단독으로 출토되는 뼈단지[骨壺] 등이 있는데‚ 근래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7세기 후반에서 9세기까지의 토기로서 민무늬토기와 도장무늬토기[印花文土器] 두 종류가 나왔다. 그 동안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적인 토기로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도장무늬토기를 대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이것은 특수목적의 토기이며 일상생활에 쓰이던 토기는 아니다. 이 시기 토기는 굽다리접시와 목항아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신라토기의 형태가 점차 소멸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부터 도장무늬토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유약을 입힌 것이 나타난다. 유약은 고온에서 증발하기 때문에 유약을 입힌 토기는 700-800 ℃의 저온에서 구워졌다. 이러한 토기들은 고려 초기 회흑색토기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청자의 발달로 곧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덮개가 있는 굽다리접시 ·파배(把杯) ·기대(器臺) 등 신라토기의 중요 형태가 이 시기에 모두 등장한다. 중기는 500년을 전후한 1세기 동안으로 서봉총(瑞鳳塚) ·천마총(?馬塚)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식리총(飾履塚) 등 주로 경주 노서동 일대의 중형(中形) 단독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들이 대표적이다. 이 시기에는 부장품으로 금관 등의 유물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토기는 별로 매장되지 않았으며‚ 토기 자체도 전기의 강건 ·소박 ·고졸함이 없어지면서 후퇴하였다. 전기의 특색이었던 기대 ·파배 등이 소멸하였고‚ 무늬도 전기의 파상집선문(波狀集線文)에서 밀집직선(密集直線) ·문살무늬[格文] ·삼각무늬 등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