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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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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남자진신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진신(油鞋)은 생가죽을 기름에 절여서 만든 것으로 진땅에서 신는 신으로 징을 박았다고 하여 `징신`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신발은 화(靴)와 이(履) 등의 한자(漢字)로 표기되는데‚ 쌍영총(雙楹塚) 벽화나 《삼국사기》 <색복조(色服條)> 등에 나타나 있듯이 상고시대부터 삼국시대를 통하여 유행되었음을 알수 있다. 화는 목이 긴 신발으로‚ 방침(防?)·방한(防寒)에 적당하여 북방민족이 많이 착용한 신발이고‚ 이(履)는 운두가 낮은 것으로 남방민족의 신발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 종류가 거의 상고시대부터 계속 혼용되었다는 것은 국토가 그다지 넓지 않다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일 것이지만‚ 북방민족 계열이라고 생각할 때 한국 고유의 신은 목이 긴 화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해동역사(涇東繹史)》에 “고려의 이(履)는 위(韋)로 발에 맞추어 만들어 신었고 묶지 않았으며 천자(賤者)는 우피(牛皮)‚ 귀자(貴者)는 녹비(鹿皮)를 사용하였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에 들어와서는 화보다 이를 많이 신은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와서는 종류와 명칭이 더욱 다양해졌다. 조선시대에 나타난 신을 크게 나누어 보면 목이 있는 화(靴)와 운두가 낮은 혜(鞋)·이(履)로 구분할 수 있다. 재료면에서 보면‚ 피혁제‚ 초마제(草麻製)‚ 포백제(布帛製)‚ 유제(鍮製)‚ 지제(紙製)‚ 목제(木製)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화는 흑피화(黑皮靴)·협금화(挾金靴)·목화(木靴)·수화자(水靴子) 등이 있는데‚ 주로 왕이나 백관이 신었다. 조선시대의 남자들의 신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흑피혜(黑皮鞋)는 조복(朝服)·제복(祭服)에 착용하는 신이며‚ 목이 길고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조선 후기에는 흑피혜 대신 목화를 착용하였다. 목화는 바닥은 나무‚ 목은 천으로 되었으며‚ 검은 융(絨) 같은 천으로 겉을 씌우고 솔기에 홍색 선(這)을 두른 반장화 같은 마른신으로 조복·공복(公服)에 착용하였다. 태사혜(?史鞋)는 여인들의 혜와 같은 남자용 마른신의 하나로‚ 가장자리에 헝겊이나 가죽을 대고 코와 뒤축에 흰 선문(線紋)을 새겨 놓았다. 이 신은 조선시대 사대부나 양반 계급의 고령자가 편복(便服)에 신었으며 한말에는 왕도 평상복에 착용하였다. 발막신은 마른신의 하나로 상류계급의 노인들이 신었는데‚ 뒤축과 코에 꿰맨 솔기가 없고 코 끝이 넓적하며 가죽 조각을 대고 분을 칠했다. 짚신은 초마제(草麻製)로 된 신이다. 초리(草履)는 짚신이고 마혜(麻鞋)는 미투리인데‚ 피혁제와 포백제 등의 화·혜가 발달하면서 천시되어 하천인의 신이 되었으나 정제품(精製品)은 사대부간에도 사용되었다. 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신은 길이가 약 25.5㎝로 남자가 신었던 것이다. 머리부분은 둥글게 융기된 모양이며 전체적인 색감은 흑색이다. 재료는 우피로 상류층에서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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