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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목서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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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허목서첩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허목의 서첩 서예는 문자(文字)를 소재로 하는 조형예술(造形藝術)으로 점과 선·획(劃)의 태세(?細)·장단(長短)‚ 필압(筆壓)의 강약(强弱)·경중(輕重)‚ 운필의 지속(遲速)과 먹의 농담(濃?)‚ 문자 상호간의 비례 균형이 혼연일체가 되어 미묘한 조형미가 이루어진다. 서예의 특징으로는 글자를 쓰는 것으로써 서예술이 성립된다. 점과 선의 구성과 비례 균형에 따라 공간미(空間美)가 이루어지며 필순(筆順)‚ 즉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성된다. 필순에 따른 운필의 강약 등으로 율동미가 전개된다. 먹은 오채(五彩)를 겸하여 검정색이지만 농담(濃?)·윤갈(潤渴)·선염(渲染)·비백(飛白) 등이 운필에 따라 여러 색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영묘(靈?)한 결과를 낳고 있다. 서체로는 전(篆)‚ 예(隷)‚ 해(楷)‚ 행(行)‚ 초(草) 가 있다. 중국 황하 문명기때 새나 나뭇가지 등과 닮은 글자를 만든 것이 시초로‚ 그 후 은(殷)나라때 거북의 등뼈나 짐승의 뼈에 예리한 기구로 새긴 갑골문을 거쳐 주(周)나라때 비로소 글자다운 체재(體裁)가 생겼는데 종정고문(鐘鼎古文)이라고도 하여 종(鐘)이나 청동기에 새겼다. 동주(東周)시대에 사주가 만든 대전(?篆)이 나타났고 대전을 필사(筆寫)하기 편리하게 점획(點劃)을 단정한 모양으로 한 것이 소전(小篆:篆書)으로 진(秦)나라의 이사가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정막(程邈)이 대전과 소전을 다시 간략화한 글자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예서(隷書:古隷)이다. 후한초기 유덕승(劉德昇)에 의해 행서(行書)가 만들어졌고‚ 후한 말기에 해서(楷書)도 생겼다. 해서·행서·초서는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기본적인 서체이다. 서예는 고대 중국에서 발달하여 문자를 뚜렷하고 아름답게 형성하려는 것으로 비롯되었지만 현대에는 조형성과 예술성도 겸하게 되었다. 특히 동양의 철학은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아름다운 내면의 정신으로 외면으로 드러난다고 하여 서예의 기교보다는 그사람의 인품을 더 중요시 여겼다. 허목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유학자다.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戒) 또는 대령노인(臺嶺老人)이며‚ 현감 교(喬)의 아들이다. 영남 남인의 거두 정구(鄭逑)에게 학문을 배웠다. 50여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1657년(효종8)에 비로소 지평(持平)이 되었다. 그 후 정릉참봉·내시교관·조지서별좌·공조좌랑·용궁현감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곧 사직하였다. 1657년 공조정랑·사복시주부를 거쳐 1659년에 장령에 임명되자 상소를 올려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吉) 등의 정책에 반대하는 등 중앙 정부에서의 정우의정에 임명됨으로써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산림(山林) 중에서 정승까지 승진한 흔하지 않은 인물이 되었다. 이때 왕통을 문란하게 했다는 송시열의 죄를 엄하게 다스릴 것을 주장하여‚ 온건론자인 허적(許積)이 이끄는 탁남(濁南)에 대비되는 청남(?南)의 영수가 되었다. 1676년에 사직하고‚ 특명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후로는 허적의 전횡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을 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할 때 관작을 박탈당하고 학문과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죽은 후 1688년에 관작이 회복되고 경기도 마전에 있는 미강서원(湄江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치활동을 시작하였다. 1659년에 현종이 즉위한 후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다시 장령이 되었다. 이때 효종에 대한 인조 계비 조대비(趙??)의 복상 기간을 서인 송시열 등이 주도하여 1년으로 한 것은 잘못이므로 3년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송(禮訟)논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삼척부사로 축출되었으며‚ 그곳에서 향약을 실시하고 읍지를 편찬하였다. 1674년 효종비가 죽었을 때 조대비의 복제를 송시열 등이 주장한 9개월복 대신 기년복으로 늘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승리하고 남인이 집권함에 따라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75년(숙종1)에 산림직인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를 비롯하여 이조참판·우참찬·이조판서 등을 거치고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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