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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 라틴어 번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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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최양업 신부 라틴어 번역판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高 주교의 불어판을 최양업 부제가 라틴어로 번역한 것(초고). <유래 및 발달과정 / 역사> 천주교 박해에 따른 순교의 역사-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정부 탄압의 대상이 되어 근 백 년 동안 10여 회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를 겪어야 하였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봄 이승훈을 비롯한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집회를 가지고 있을 때 관리들에게 검거됨으로써 일어났다[乙己秋曹摘發]. 체포된 신도들 가운데 중인 김범우는 귀양을 가서 희생되었으며 그는 이 땅에서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제사를 거부했던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 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신해박해]. 1795년의 박해는 주문모 신부의 체포령에서 발단되었는데 윤유일(尹有一)‚ 최인길‚ 지황 등이 신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희생하였다[을묘박해].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는 순조(純祖)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신유박해이다. 교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집권층에서는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을 단행하게 되었다. 이 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았으며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였고‚ 교회의 지도자인 신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헌종(憲宗) 때 두 번째로 큰 박해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1839년의 기해박해이다. 이 박해로 당시 3명의 선교사(앵베르 주교‚ 모방과 샤스탕 신부)가 모두 순교하였고‚ 또 정하상‚ 우진길‚ 조신철 등 교회의 요인들이 많이 순교하였다. 이 박해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한 이유로 조선정부의 천주교 탄압은 국제적인 문제로까지 확산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1846년의 박해(병오박해)는 김대건(金?建) 신부의 체포가 그 발단이 되었다.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한국 최초의 신부로 서품된 그는 서해안에서 선교사의 입국로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1860년에 거듭된 박해(경신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이에 고종(高宗)의 후견인으로 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院君)은 대규모의 박해를 강행하였다. 1866년에 시작된 소위 병인박해는 그 후 근 10년간 계속되면서 병인양요‚ 남연군묘 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신미양요 등으로 더욱 격화되었다. 박해로 말미암아 처음에 교회를 주도했던 양반과 지식층이 물러나고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이 교회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으며‚ 처음에 주로 도시에 집중되었던 천주교는 박해로 인해 산간벽지로 들어가서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참고> Ferreol 高주교-Ferreol‚ Jean Joseph (180의 길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여의치 않던 중‚ 그를 찾아온 김대건(金?建)을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기로 하고 자신은 마카오로 되돌아갔다. 조선 입국에 성공한 김대건은 주교와의 약속대로 배를 구입하여 상해로 다시 돌아와서 주교에게 연락하니‚ 주교는 그 때 프랑스로부터 새로 파견되어 온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를 거느리고 상해로 왔다. 이어 함께 배를 타고 한국 서해안에 다다라 충청도 나바위[羅岩)라는 곳에서 닻을 내렸다. 조선 입국을 시도한 지 6년 만인 1845년19월 12일이었다. 곧 서울로 올라와 전교활동을 전개했으나‚ 얼마 안 되어 그가 조선 입국에 앞서 상해에서 신품을 준 김대건 신부를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는 가운데 1851년을 맞이한 주교는 거듭된 박해와 1만여명의 신자를 돌보아야 하는 과중한 업무때문에 과로로 점차 건강이 쇠약해져 1853년 2월 3일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그는 제 3 대 주교로서 조선 입국 이래 8년동안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조선 교회를 소생시킨 큰 공을 남겼으며‚ 그의 유해는 4월 12일에 안성(安城) 미리내에 있는 김대건 신부 무덤 옆에 묻혔다. <일반적 형태‚ 특질> 원본은 현재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관되어 있으며 안타깝게도 본 소장품은 복사본이다. 하지만 그 역사적 가치로 볼 때나 교육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본 소장품은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추후 원본을 이양받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8∼1853) 제3대 조선교구장. 1808년 12월 27일에 프랑스 아비뇽 (Avignon)에서 태어나 1838년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으며 1839년 5월초에 프랑스를 떠나 극동으로 향하였다. 1840 년 1월 23일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다시 배를 타고 중국에 상륙하여 중국대륙을 횡단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페레올 신부는 그 곳에서 앵베르 주교로부터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의 지시대로 조선 입국을 위해 양부(Yang Vou)로 가려고 했으나 요동 지방 신자들의 적의로 말미암아 그 곳에 갈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1838년 8월 14일자로 벨리나(Bellina)의 명의주교로서 계승권을 가진 조선교구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1843년 12월31일 만주교구의 베롤(Verrolles) 주교로부터 성성식을 받았다. 이에 더욱 조선 입국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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