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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출자증권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의 경제상황 - 항만> 일제하의 인천항은 수도와 인접해 있는 조선의 관문항으로서 황해도·충청도·경기도의 물자가 이곳으로 모여 집산을 거듭할 뿐만 아니라 일본·중국으로까지 그 상권이 뻗쳐 있었다. 인천항은 청일전쟁 이후 미곡 반출의 창구로서 이용하여 왔기 때문에 투자가 집중되어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고‚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인천항을 대륙침략의 교두보인 병참기지로 육성할 필요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항만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갔다. 인천항은 수도의 관문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경인철도에 의해 무역액에서 수위를 유지하여 왔으나‚ 1904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 이후 부산항에 물동량에서나 항만시설에서도 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인천 축항 진정운동이 당시 인천항의 상권을 쥐고 있던 일본거류민단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1906년부터 6개년 사업으로 부두확장과 세관시설 정비‚ 내항의 준설공사 등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0m를 넘는 조수간만의 차는 인천항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문제였고‚ 이에 따라 1911년부터 항만의 설비확장공사를 실시하여 1918년 갑문식 선거가 완공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인천지역의 경제상황 - 미두취인소> 개항 이후 정미업(精米業)은 인천의 산업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지역공산품 총 생산액의 80∼90%를 차지할 만큼 독보적인 위치였다. 당시 인천은 일본인 미곡상들의 결집지로‚ 그리고 전국의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항구로서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미시설은 계속 확장되어 갔고‚ 정미업은 인천공업계를 주름잡았다. 인천의 인구가 6만여명에 불과하던 1930년대에 정미소가 무려 60여개에 달했을 정도였다. 보통 정미소 하나에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이 종사했으니 인천산업에서 정미업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정미업이 이 같은 지위를 확고하게 다지게 된 배경엔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의 탄생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은 미곡수매와 미가조정의 편익을 꾀하고 미곡의 품질표준을 확정‚ 한국미의 질적 향상에 기여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주요 미곡상을 중심으로 1896년 인천미두취인소를 설립했다. 1896년 설립된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는 일제강점기에도 계속 그 기능을 발휘하였고‚ 조선총독부는 1931년에 이르기까지 다른 미곡취인소의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선물거래(先物去來)·청산거래(?算去來)를 주로 하는 미두취인소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인천에서만 설립 운영되었다. 인천미두취인소는 일본의 미곡수출기구로서 기능하였다. <내용> 금융조합은 주로 농민 및 지방 중·소 상공업자 등 서민층의 금융을 도우려는 목적으로 협동정신 하에 설립되었던 사단법인체로 오늘날의 신용협동조합에 해당한다. 이 자료는 소화 18년(1943) 김포군 양곡면에 거주하는 권등정옥(權藤精?)이 김포금융조합(金?金融組合)에 1구좌 10원의 출자를 증명하는 출자증권이다. <특징> 보존상태 양호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사 2 인천의 발자취}‚ 2002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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