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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502년명한냥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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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개국502년명한냥은화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조선개국오백이년명(朝鮮開國五百二年銘)`한냥은화는 고종 30년(1893) 인천전환국에서 발행한 은화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조되었던 화폐는 성종 15년(996) 4월에 처음으로 철전(鐵錢)을 사용하였다는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전이다. 그 이전에는 곡물·직물·철 등의 상품화폐가 일반적인 유통수단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이외에도 지형을 본떠 만든 은화인 은병(銀甁)과 소액화폐로서 해동통보(涇東通寶)·해동중보(涇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삼한중보(三韓重寶)·동국통보(東國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등이 숙종대에 발행되었다. 고려시대의 주화는 주전도감(鑄錢都監)에서 주조되었으나‚ 숙종 2년(1097) 12월 주전궁(鑄錢宮)을 두어 홍복도감(弘福都監)에서 발행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화폐를 사용하다가 세종 5년(1425)에 조선통보(朝鮮通寶)가 발행되었고‚ 세조 10년(1469)에는 무기로도 사용될 수 있는 화살촉 모양의 전폐(箭幣) 10만개를 주조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상품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화폐의 필요성이 확대됨에 따라 숙종 4년(1678)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발행되었는데‚ 이는 근대화폐가 주조되기 전까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초기에는 호조(戶曹)·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廳)·어영청(御營廳)·훈련도감(訓練都監) 등의 중앙관서에서 주조하였고‚ 1678년 6월 평안도와 전라도의 감영과 병영에서도 동전을 주조케 하였으나‚ 주화의 소재가치가 일정치 못하여 공신력이 저하되자 정조 10년에는 호조와 선혜청(宣?廳)에서만 주전을 담당케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조세수입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화폐의 주조권을 남용하여 명목가치와 실질가치의 괴리가 큰 당오전(當五錢)과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였다. 폐제의 문란이 일어나자 고종 5년(1868) 당백전의 통용을 금지시키고 1867년 가경통보(嘉慶通寶)·도광통보(道光通寶)·동치통보(同治通寶) 등의 청전(?錢)이 수입되었는데‚ 실질가치는 상평통보의 1/3에 불과하였으나‚ 상평통보 유통량의 30∼40%에 달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화폐는 고종 19년(1882)에 발행한 대동일전‚ 대동이전‚ 대동삼전이라는 은화이다. 은화는 청국에서 구입한 마제은 3만냥을 원료로 호조에서 주조하여 유통시킨 것으로‚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지 않고 뒷면의 작은 원안에 `호`자를 새겼다. 그러나 상평통보에 비하여 소재가치가 높아 재산축적용으로 저장되거나 해외로 유출되어 거의 유통되지 않았고‚ 마제은의 가격급등으로 9개월만에 주조가 중단되었다. 고종 20년(1883) 7월에는 당시 사무협판이었던 독일인 뮐렌도 일본에서 수입되는 주화용 원료운반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하여 인천으로 전환국을 이전하였다. 이에 인천전환국에서는 용산으로 이전하는 광무 4년(1900) 6월까지 닷냥은화‚ 한냥은화‚ 이전오푼적동화‚ 오푼동화‚ 일푼동화 등을 주조하였다. 1900년 용산으로 전환국이 이전하였으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압력에 의해 일본인 재정고문이 부임하면서 전환국의 폐지안을 제출함으로써 전환국이 폐지되었다. 주화의 앞면에는 `일량(一兩)`이란 글자가 가운데에 새겨져 있고‚ 그 둘레에는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나무 가지를 우측에 국화인 무궁화가지를 좌측에 도안하였다. 뒷면에는 중앙에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쌍룡을 새겨 넣었고‚ 둘레에 `조선개국오백이년(朝鮮開國五百二年)`이라는 연기와 `한량`‚ `1YANG`이라는 가치를 한글과 영어로 새겼다. 1893년 주조된 화폐에는 전년의 `대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대신하여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고 있는 이는 청의 위안스카이가 "청국이 대국이오. 조선은 소국이니 `대조선`이라는 국격상 체모에 불합하다"고 간섭하여 `대(?)`자의 제거를 요청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하자 개국 504년에 주조된 5푼적동화에는 다시 `대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이는 국력이 약했던 조정이 주변국들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이 화폐주조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르프의 건의를 수용하여 상설 화폐제조기관인 전환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제조기계와 기술 인력 등이 부족하여 당오전의 주조만을 담당하였다. 이듬해 뮐렌도르프가 전환국 총판으로 임명되면서 독일에서 압인기가 수입하여 경성전환국이 발족되었고‚ 1885년 독일 기술자를 초빙하여 시주화 15종(금화 5종‚ 은화 5종‚ 동화 5종)을 주조하면서 압인식 화폐의 주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유통된 것은 1환은화‚ 십문동화‚ 오문동화 3종이었는데‚ 이는 금은 보유량이 부족하였으며‚ 화폐가 통용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고‚ 화폐로 얻어지는 이윤이 적었기 때문이다. 고종 25년(1888) 중단된 화폐주조는 1892년 조폐기기를 인천전환국으로 옮겨 다시 제조되기 시작하였다. 고종은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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