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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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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민영환유서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본 유물은 한말의 문신이자 순국지사였던 민영환(1861.7.2-1905.11)의 유서이다. 민영환은 본관은 여흥‚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다. 민겸호(謙鎬)의 아들이며 명성황후의 조카로‚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되었다. 1877년(고종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 18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 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다. 의정대신(議政?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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