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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귀달린녹유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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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네귀달린녹유항아리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사이호(四耳壺)는 항아리의 어깨 부분에 네 개의 귀를 단 항아리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형태는 중국의 경우 기원전부터 사용되었다. 이러한 중국제 사이호는 우리 나라에도 전해져 삼국 시대의 토기 등에서 이러한 기형이 보이고 있다. 그 예로써 백제의 무령왕릉(武零?陵)에서는 중국제의 흑갈유사이호(黑褐釉四耳壺)가 출토되고 있으며 또한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자기를 모방한 형태가 제작된 토기사이장경호(土器四耳長頸壺)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이호는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까지 이어져 청자‚ 백자 등으로 계속하여 제작되었다. 녹유의 시유 기술을 우리 나라의 경우 사비시대의 백제에서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窯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 부여 정암리(7세기)‚ 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 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 등에 남아있다. 이 선구적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익산 미륵사(彌勒寺)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히고 있다. 또한 국보 제125호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녹유골호(綠釉骨壺)로써 매우 우수한 작품이 전한다. 또한 보물 제453호로서 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전하는 녹유탁잔(綠釉托盞)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넓고 낮은 굽이 달려있는 받침대의 중앙에 원통형의 잔 받침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하여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施釉術)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陶瓷器)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본 유물은 중국제의 항아리로써 19-20세기쯤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녹유사이호(綠釉四耳壺)이다. 백자 태토(胎土)에 녹유(綠釉)를 시유(施釉)하였다. 현재는 유약이 거의 탈색되어 버렸다. 유색(釉色)은 녹갈색(綠褐色)을 보인다. 기형을 보면 동체(胴體)가 가로 길이보다 세로로 긴 형태이며 목이 짧고 누웠다. 어깨에는 네 개의 귀를 달았다. 뚜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동체만이 남아있다. 구연부(口緣部)가 한쪽으로 약간 기울었다. 물레에서 성형을 한 후 기면(器面)을 정리하지 않아 물레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중국 도자사에 있어서 연유계(鉛釉系) 녹유의 시유 기술은 한대(漢代)에 처음 시작되었다. 최초의 유일한 예가 漢왕조 건국 직전인 기원전 3세기의 유개호(釉蓋壺)이다. 이 항아리는 당시의 청동기 형태를 토대로 하였으며 청동기 장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태토는 다소 경질의 불그스름한 토기인데 저부까지 입혀진 유약은 광택 좋은 갈색조의 초록색을 띤다. 이 유개호 이후로 불그스레한 태토는 토기가 산화염으로 번조되었음을 말해 주는 기준이 되었다. 유약의 색은 향상되었으며 흔히 산화동을 추가함으로써 발색이 좋은 녹색을 얻었다. 연유(鉛釉)는 매장용의 도기에 한해 사용되었던 듯 하다. 이렇게 매장용에 국한시킨 것은 연유가 유해하였기 때문이다. 서한과 동한 시대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였던 장안과 낙양에 사는 도공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것도 사실 연유의 유독성 때문이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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