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검색

  • 이미지 유형

라이선스 유형

이미지

백자고배

추천0 조회수 62 다운로드 수 2 일반문의
  • 해당 공공저작물은 외부사이트에서 보유하고 있는 저작물로써, 원문보기 버튼 클릭 시 외부사이트로 이동됩니다. 외부사이트의 문제로 인하여 공공저작물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사이트 바로가기 를 클릭하여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저작물명
백자고배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18세기는 숙종(肅宗)‚ 영조(英祖)‚ 정조(正祖)의 시기로 조선시대 후기 문화의 전성기였다. 실학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농업 생산력의 향상과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시기였다. 문예(文藝)에 있어서도 시조‚ 판소리‚ 서민문학‚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 등으로 문화의 황금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백자에 있어서 고전적인 유백색(乳白色)‚ 설백색(雪白色)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가 제작되었으며‚ 그 제작의 중심이 광주(廣州)의 금사리와 분원리였다. 18세기 전반의 편년자료를 살펴보면 1700년 전후해서 백자의 색이 회백색에서 유백색‚ 설백색으로 바뀌고 있음을 1683년의 숙인남양홍씨묘지(淡人南陽?氏墓誌)와 1702년의 백자청화윤서속묘지(白磁靑畵尹敍續墓誌)‚ 1705년경의 백자청화이사실묘지(白磁靑畵李士實墓誌)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리고 1710년대에 궁평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철화백자편‚ 1724년경의 백자철화 `進上茶甁`銘甁의 존재‚ 금사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철화백자 편의 존재로 보아 1720-30년대까지 철화백자의 제작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사리 가마에서는 유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이루어진 둥근 달항아리를 비롯한 다양한 항아리와 굽이 높아진 각종 제기(祭器)‚ 각(角)과 면(面)을 다듬은 병(甁)‚ 호(壺)‚ 청화로 간결하게 매화‚ 대나무‚ 패랭이‚ 난초‚ 국화 등이 시문된 호‚ 발(鉢)‚ 접시 그리고 추초문으로 불리는 야생의 풀들이 간결하게 시문된 청화백자 등의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18세기 후반의 백자는 광주 금사리 가마를 뒤이어 광주 분원리로 관영(官營) 사기공장을 옮기고 제작활동에 들어갔다. 관영 사기공장인 분원을 교통이 편리한 곳에 고정시켜 10년 마다 분원을 옮기는 낭비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17세기말부터 주장해 오던 사옹원관(司饔院官)의 요청에 따라 한강가에 땔나무를 실어 오기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백토를 옮기기에도 알맞은 분원기에 가마가 고정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금사리 가마에서 만들어진 것과 같은 유백색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의 병‚ 호‚ 제기‚ 문방구(文房具) 등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어 다양한 무늬의 기명이 제작된다. 항아리의 경우 어깨부분과 목 부분에 여의두문대나 연판문대 등이 장식되기 시작하였고‚ 무늬의 주제도 산수‚ 매조‚ 인물‚ 동식물 등의 회화적인 것이 보이며‚ 각병‚ 각호‚ 각접시 등의 기명이 더욱 활발하게 제작되었고‚ 필통‚ 필가‚ 연적 등의 문방구류의 제작도 활발해진다. 특히 청백색 백자의 제작이 18세기말에 시작되어 양각‚ 음각‚ 상형‚ 투각의 깔끔하고 청초한 조선 후기 백자가 만들어지며‚ 또한 산화동을 안료로 한 동화(銅畵)백자의 제작이 분원과 영흥 등의 지방에서 개성 있게 이루어졌다. 본 유물은 조선 18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고배이다. 유색(釉色)은 순백(純白)에 가깝다. 유약에는 잡물이 적고 유면(釉面)은 매끄럽고 광택이 있다. 완형(完形)의 상태를 보인다. 기형을 보면 물건이 담기는 부분은 보통의 사발 형태로써 바닥은 둥글고 곡선을 그리면서 구연(口緣)에 다다른다. 굽은 아래로 가면서 점점 넓어졌다. 굽이 높다. 문양이 전혀 시문(施文)되지 않은 소문백자(素文白磁)이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