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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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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묵란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사군자(四君子)는 세한삼우(歲寒三友:松竹梅) 중의 매화와 대나무에 국화와 난초를 더한 것으로 명나라 때 진계유(陳繼儒)가 《매란국죽사보(梅蘭菊竹四譜)》에서 매란국죽을 사군자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사군자화는 삼우도(三友圖)와 같이 세상의 오탁(汚濁)에 물들지 않고 고절을 지킨 문인·고사(高士)·화가들의 화제로 애호의 대상이었다. 묵매도(墨梅圖)는 북송(北宋)의 미불(米?)이 시작하였다 하나 확실하지 않고‚ 화광중인(華光仲仁)·양보지(楊補之)가 유명했으며‚ 묵죽도는 명대(明代)에 와서 일반화한 것으로 계예(計禮)·황익(黃翊) 등이 유명했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성행‚ 조선에 계승되어 사대부의 유교 교양의 일부로 널리 퍼졌고 남종화파(南宗畵?) 중 문인화가들이 즐겨 그렸다. 어몽룡(魚?龍)은 묵매도(墨梅圖)로‚ 이정(李霆)은 묵죽도(墨竹圖)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왕조 말기에 남종문인화풍의 유행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문자향(文字香) 또는 서권기(書卷氣)를 풍기는 높은 경지의 깔끔한 남종화를 중히 여겼다. 그는 묵란(墨蘭)과 산수를 잘 그렸고‚ 전형적인 남종문인화의 경지를 개척하여 그의 후학(後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정희의 이러한 높은 문인화의 경지는 그의 《묵란도(墨蘭圖)》에서 잘 드러난다. <묵란도>는 김정희의 전형적인 사란(寫蘭)과 서체(書體)를 동시에 잘 드러내 보여 주는 대표작이라 하겠다. 김정희는 사란이 화법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였고 또 서예의 예법(隸法)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그의 견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오른쪽 구석에서 꿈틀대듯 힘차게 솟아나 굽어진 난초를 화면의 중앙에 그려 넣고 그 주변의 여백에 제찬(題贊)을 써넣었다. 이 난초의 굴곡진 모습은 흡사 그의 서체를 보는 듯하다. 주변에 씌어진 그의 글씨는 굵고 가는 획들이 서로 엇갈려 몹시 거칠고 또 지극히 힘하다. 마치 여러 해에 걸친 유배(?配)생활에서 응축된 그의 감정이 폭발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김정희는 조희룡(趙熙龍: 1789-1866)‚ 허유(許維: 1809-892)‚ 전기(田琦: 1825-1854)‚ 권돈인(權敦仁: 1783-1859) 등의 여러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묵란을 유행시켜 흥선대원군(興宣?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을 비롯한 여러 선비 화가들이 이를 즐겨 그리게 하였다. 이들은 함께 묶어 김정희파(金正喜?)라고 지칭해도 좋을 듯 하다. 본 유물은 조선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평양을 주무대로 활동하던 수암 김유탁(守岩 金有鐸)의 작품이다. 종이에 수묵(水墨)으로 그렸다. 김유탁은 특히 묵란을 잘 그려서 김정희를 시작으로 비롯된 묵란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 구도를 보면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 주로 중심을 두고 있다. 화면의 오른쪽 중앙에 기암괴석을 배치하고 그 위아래에 바위에서 뻗어나 자라는 난을 그렸다. 그 선이 매우 세장(細長)하고 부드럽다. 화면의 왼쪽 상단에 제발(題跋)을 쓰고 낙관(落款)을 찍어 균형을 맞추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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