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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근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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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오정근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호는 만회(晩?)‚ 본관은 해주(涇州)이다. 1885(고종22)년 증광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승지를 지내고‚ 갑오경장때 관직에서 물러난 뒤 1899년 정계에 복귀하여 주로 왕실의 전례?의장에 관련된 장례원소경?궁내부특진관?규장각학사?봉상사제조?경효전제조와 같은 직책을 지냈다. 문집 "만회유고(晩?遺稿)"가 1939년에 간행되었다. 성이 적혀있지 않아 그 오정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정근이 벼슬자리에 있으면서 상관에게 보낸 답장서신이다. 지난날 편지를 받았지만 입장이 여의치 않아 답장을 못 올렸다며 간단한 안부를 먼저 물었다. 서른 두 냥을 받은 것 중 다 쓰고 남은 것이 겨우 이십여 냥 남았는데 내각의 사세가 날로 병들어 가는 형편에 서리들은 내월 초엔 한 푼도 나눠줄 것이 없다 하니 만일 이 자리에 오래 있게 되면 창피함을 못 면하겠다고 한탄하였다. 昨?下書 適因門限 未卽上答 伏未審寒少弛 氣體候?來萬安 伏慕區區無任下誠之至 子眠食無? 而今朝嘉會亭日次所?審 而才退耳 就伏白子之祿 昨日?堂 隸受代錢三十二兩 來納于此 而此際 藥峴金待敎萬秀 適以摠禦營軍司馬 肅謝次來會坐 飭此中錢亦七兩取之 貰果座中之人 皆爲喫之 其餘錢才二十餘兩矣 以此下諒伏望 而日以柴?下送錢一兩 置之伏望 此中所用 以此錢用下伏計 朴生 將以下鄕次 俄已出去矣 當以此意稟過云耳 伏望下飭呂生 卽爲入送之地 伏望 敎書草三張 昨日?草 朴生將以斥正於魚台次持去矣 下諒下覽伏望 使?從送言於?邊事 間或一次下問於?從?都事耶 閣內事勢日益痼?矣 差下色書吏來告 曰來月初無差下錢財一分云 則閣屬勢將散去矣 此將?何 不幸逢之耳 若以時任久居 則似不免昌被之端 只自伏歎 差下色書吏各色 俄告此事狀耳 餘不備 上書 是朝 子 正根 上書 <기타참조> "편지-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 순천대박물관‚ 2003. <참고문헌> "편지-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 순천대박물관‚ 2003.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8.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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