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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승필 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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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이건승필 서간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1-3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개설> 서간은 일반 글과는 달리 말 대신 쓰는 글로 수신인이 있고 수신인과의 관계에 따라 적절한 예법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서간문이라는 형식이 생겨났다. 발신인(發信人)‚ 수신인(受信人)‚ 용건(用件)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이두로는 고목(告目)‚ 기별이라고 하고‚ 조선시대 이전부터는 우무‚ 유무‚ 글월이라 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와서 편지라는 말이 쓰였다. 순한문이나 이두문을 섞어 쓰는 한문서간과 순한글이나 한자를 섞어서 쓰는 언간(諺簡)이 있으며‚ 한글편지는 내간(內簡)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한문서간에는 수필과 평론의 구실을 하는 문학작품인 것도 있어 한묵(翰墨)이라는 명칭도 생겼다. 내용에 따라 문안(問安)‚ 평신(平信)‚ 하장(賀狀)‚ 위장(慰狀) 등으로‚ 용도에 따라 실용서간과 문예서간으로 나뉜다. 현대의 편지글에는 한문서간과 일본서간이 스며 있다. <작가> 이건승은 조선 말기의 학자·문인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보경(保卿)‚ 호는 경재(耕齋).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의 아우이며‚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재종형이다. 이건승은 매천(梅泉) 황현(黃?)과 깊이 교유하였다.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에서 연원하는 강화학파(江華學?)의 학맥을 이어서 양명학적인 사상을 지녔다. 황종희(黃宗羲)의 ≪명이대방록 明?待訪錄≫의 진보적 사상에 공감하였다. 이건방과 함께 담헌(饋園) 정인보(鄭寅普)의 스승으로서 양명학적 사상을 그에게 전수하였다. 이건창·이건방이나 마찬가지로 갑오정국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을사조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자 홍승헌(?承憲)·정원하(鄭元?)와 함께 자결하려 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때에 황현에게 낸 편지에서 이건승은 “이보경(李保卿)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구차하게 살고 있다.”고 자조적인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06년에는 강화도 사기리(沙磯里)에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였다. 교육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대한자강회(?韓自强會)를 지지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정원하(鄭元?)의 뒤를 따라 만주의 회인현(懷仁縣)으로 망명하였다. 망명길에 개성에 거주하는 홍문관 시강 왕성순(??減)의 집에 십여 일 머물렀다. 왕성순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여한구가문초 麗韓九家文?≫에 서문을 써 주었다. 김택영의 글을 합하여 ‘여한십가’로 하도록 권한 인물이다. 김택영도 이건승과 교유가 있었다. 문집으로 필사본 ≪해경당수초 涇耕堂收草≫가 전한다. <일반적 형태 및 특징> 이 글은 이건승이 황현에게 보낸 것이다. 황운경(黃雲卿)이 아직도 인간 세상에 머물고 있는가.한 화를 당하여 죽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아들이 죽고 금년 봄에 또 자부가 죽으니‚ 늙은 부처(?始)가 눈물만 흘리며 서로 대하고 있을 뿐입니다. 좋은 때에 태어나지 못한 것은 다른 사람과 같은 바이나 운명이 유독 궁함이 어찌 이 극에 이르렀는고. 마땅히 천명을 순히 받아들일 것인데 그것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흉중(胸中)이 때때로 번뇌하여 안정하지 못하며 요사이 화기로 빌미가 되어 병이 심합니다. 이 고뇌 많은 세상 어느 곳이 피안(彼岸)입니까. 공분(公憤)이 심중에 차서 사사로운 슬픔은 말할 겨를도 없이 붓을 잡고 종이를 대하매 갑자기 이에 이르렀으니‚ 형의 넓은 마음을 더럽힐까 두렵습니다. 나를 위해 한번 찡그려 주십시오. 몸소 밭갈며 구차하게 보전하는 것도 또 쉽지 아니한데 멀리서 생각해 보니‚ 지리산은 복된 땅이라 이곳에 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일찍이 모든 충성스런 사람들을 위하여 만시(輓詩)를 지었는데 이제 보내어 보시게끔 합니다. 이상철(李相哲) 공은 문벌이 있는 잡안이 아니고‚ 그 세덕(世德)은 자세히 알지 못하겠으나 관(官)이 학부주사였는데 변을 들을 즉시 죽었고‚또 김봉학(金?學)은 상등병(上等兵)이었는데 변을 듣고 밤새도록 울며 취하고 미친 듯하였습니다. 동료들이 미쳤다고 하였는데 날이 밝아서 보니 약을 마시고 죽어 있었습니다. 이보다 먼저 저 왜(倭)가 우리 군대를 시켜서 총을 다 거둬들이더니 몰래 노리쇠를 빼버려 겉모양은 완연히 전과 같으나 실상은 우리로 하여금 탄환을 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김상등병이 더욱 분개해서 거사(擧事)하려 하였으나 총을 쏠 수 없어 이루지 못한 것 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몸을 바친 것은 천성이지 어찌 이른바 문벌이나 당파에 있었겠습니까. 다만‚ 평생에 어떠한 상태인 줄을 잘 모르는 사람도 깨달았는데 이같은 두 눈알은 이에 말똥보다 못하다 할 것입니다. 선형 영재께서 만약 계셨다면 의(義)에 처하기를 어떻게 했을는지 모르겠으나‚ 필경 타고난 수명대로 살지 못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전번에 편지에 시험삼아 나를 기롱하기를‚ 내가 편지한 뒤에야 형이 답할 것이라 한 것은 진실로 죄인 줄 알지만‚ 돌이켜보건대 이 궁색하고 슬프고 고달픈 사람은 국변(國變)이 있기 전부터 산 사람의 형편이 아닙니다. 이렇기 때문에 죄를 지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성품은 이습지(李習之) 같고‚ 사람 마음은 은홍교(殷?喬)같아서 무슨 연유로 편지를 계속할 수 있었겠습니까. 보내 주신 칠절시(七絶詩 )는 심히 감사하며‚ 시가 또한 깨끗하고 새로워 사랑스럽습니다. 만약 다시 인편이 이보경(李保卿)은 어리석고 미련하여 구차하게 살아 있을 뿐입니다. 나라는 망했는데 아직 생존해 있고‚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살아 있는 것은 다 정상적인 이치가 아니며‚ 동호(東湖)의 나무꾼도 사람을 비웃은 지 이미 오래인데 어찌 오늘까지 기다렸는가. 그러나 이미 죽지 안했으면 마땅히 깨달아 앎이 있을 것이고‚ 깨달아 앎이 있으면 이 글을 보고 마땅히 옛정을 일으켜 흔연히 그 사람을 보듯 할 것이며‚ 또 붓을 들어 답을 하면 이에 산 사람의 도리가 갖추어질 것입니다. 글 보내기 전의 안부는 이미 다 알았으나 편지 보낸 뒤의 기거(起居)는 어떠한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건승(建昇)은 공적(公的)으로 울분하여 죽지 못하고‚ 사적(私的)으로도 참혹 있거든 나에게 팔애시(八哀詩 )를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감기로 베개에 누워 있어 겨우 이 편지를 씁니다. 오직 형의 몸 자중자애(自重自愛)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건승 배상 <기타참조>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하‚ 미래문화사‚ 1985. <참고문헌> "국역 황매천 및 관련인사 문묵췌편" 하‚ 미래문화사‚ 198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전싱문화연구원‚ 1992.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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