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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스님 명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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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서암스님 명정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장례 때 운구 행렬을 이끌고 매장시 널 위에 덮어 묻는 기(旗)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일반적으로 비단 홍포(紅布)에 흰색 글씨로 쓴다. 벼슬이 없는 사람의 명정은 "학생000공00지구(學生000公00之柩)"라고 쓰며‚ 벼슬이 있는 사람은 학생 대신 관직을 넣어 사용한다. 본관과 이름은 모두 해당 고인에게 맞춰 적어 넣으면 된다. 명정을 쓴 다음에는 위아래의 끝에 대를 넣어 편편하게 하고 출상(出喪)전에는 관을 모신 동편에‚ 출상 시에는 긴 장대에 달아 영구 앞에서 들고 가며‚ 하관 시 관 위에 덮고 묻는다. 이것은 상여로 출상할 때의 경우다. 이 명정은 2003(불기2547)년 4월 2일 경북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에서 있었던‚ 전 조계종 종정 서암당 홍근 대종사의 다비식 때 사용한 것으로 다비 행렬을 맨 앞에서 이끌었다. 내용은 "전불심등 부종수교 전조계종정서암당홍근대종사각령(傳佛心燈 扶宗樹敎 前曹溪宗正西庵堂鴻根?宗師覺靈)"이라고 하여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서암스님의 명정임을 나타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끝부분에 일반인들은 "--지구(之柩)"라고 하여 관을 표시하지만‚ 화장(火葬)을 하는 스님들의 명정에는 "--각령(覺靈)"이라고 한 점이 특징이다. 서암스님의 본명은 송홍근(宋鴻根)이고 1917년 10월 8일 부친 송동식(宋東植)과 모친 신동경(申東卿)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셨다. 부친께서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함에 따라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게 되어 추위와 굶주림으로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1932(16세)년에 예천 서악사의 화산(華山)스님을 은사로 수행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1935(19세)년에 김룡사에서 낙순 스님을 戒師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게 된다.1937(21세)에 김룡사에서 금오(金烏)스님의 밑에서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그해 대덕법게를 품수하게 되었다. 1938(22세)년에 김룡사 강원을 졸업하고‚ 일본대학교 종교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던 중 폐결핵 말기 진단을 받고 귀국하였다. 1942(26세)년에 김룡사 중암선원에서 용맹정진하여 각고의 수선(修禪)을 하였다. 1944년 이후 금강산 마하연과 사불산 대승사‚ 나한굴‚ 덕숭산 정혜사‚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칠불암‚ 희양산 봉암사 등지에서 정진하셨다. 특히 1946(30세)년 계룡산 나한굴에 들어가시면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살아서 이 굴에서 나가지 않으리라’결심하고 고행에 들어 갔다. 후에 누가 오도송(?道頌)을 묻자 “오도송이고 육도송이고 나는 그런 거 없다”고 하셨다. 1970(54세)에 봉암사 조실(祖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시고 1975(59세)년에 제 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하셨다. 1979(63세)에 희양산 봉암사 조실에 추대되시어 낙후된 가람을 중창하시고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만드셨다. 1991(75세)년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에 취임하시고 1993(77세)년에 제 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40분에 봉암사 염화실에서 87세를 일기로 입적(入寂)하셨다. <유사용어> 만사(輓詞). 만시(輓詩)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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