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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 이강년 선생 창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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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운강 이강년 선생 창의록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운강 이강년선생의 창의사적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개설> 조선 말기에 국란(國亂)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李康秊)선생의 창의사적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역사> 1896년(고종 33)부터 13년간 의병장으로서 경상도·충청도·강원도 등지에서 50여 차례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본관 전주(全州)이고 호 운강(雲崗)이며 자 낙인(樂仁/樂寅)이다. 이강년은 유학과 병서에 조예가 깊었으며‚ 1880년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때 낙향하였다.1895년(고종 32) 일본군이 침범하자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문경의 동학군을 지휘‚ 일본군과 탐관오리를 무찔렀다. 1895년 을미사변 때는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어 제천(堤川)에서 유인석(柳麟錫)을 만나 그의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조령(鳥嶺)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순종 원년) 도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고종의 칙령으로 도체찰사에 제수되었다. 그 당시 일본의 침략정책이 더욱 노골화되자 영춘(永春)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켜 때마침 원주(原州) 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부대와 합세하여 충주(忠州)를 공격하였다. 그 후 가평(加平)·인제(麟蹄)·강릉(江陵)·양양(襄陽) 등지에서도 큰 전과를 올렸다. 1908년(순종 1) 용소동(龍沼?) 갈기동(葛其?) 백담사(百潭寺)·안동서벽(安東西壁)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청풍(?風)의 금수산(錦繡山) 청풍전투에서 체포‚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사회 문화적 의의> 한국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아‚ 고구려와 백제유민(遺民)의 국가부흥을 위한 의병투쟁에서‚ 가까이는 중국에서 투쟁한 항일의병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병운동이 있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의 소식이 전해지자 살왜(殺倭)를 기치로 한 의병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그럼으로 해서 의병활동이 대중적 기반 위에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회유책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의병운동은 국민대중 속으로 파급되었으며 이강년 선생은 지방 의병부대와 합류하거나 단독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애국항전의 대열로 궐기하여 1896년(고종 33)부터 13년간 경상도·충청도·강원도 등지에서 50여 차례나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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