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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법첩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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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대가법첩 (三)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2-01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정의> 대가들의 글씨를 모아서 필첩(筆帖)을 만든 것. <일반적인 형태 및 특징> 여기서 대가는 동기창(董其昌)‚ 유용(劉墉)(유용)으로 그들의 글씨를 모아 만든 필첩이다.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은 중국 명대의 문인 화가‚ 서예가로 행서‚ 초서에 능했다. 자는 현재(?宰)‚ 호는 사백(?白)‚ 향광(香光)‚ 사옹(?翁)이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589년에 진사가 되고‚ 남경예부상서(南京禮部尙書)가 되었으나 환관의 횡포와 당쟁 때문에 사임하고‚ 1631년 옛 자리로 복귀하여 3년 후 태자태보(?子?保)가 되었다가 사임하였다. 사후에 태자태부(?子?傅)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관리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문명(文名)도 높아 시인 ·서가 ·문인화가로서 널리 알려졌고‚ 감식(鑑識) ·감장(鑑藏) ·임모(臨模) 등에도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 말 제일의 인물이었으므로 당시의 화단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고 화풍이나 소론(所論)은 후세 오파(吳?) 문인화가에게 결정적 감화를 주었다. 저서인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남종화(南宗畵)를 북종화(北宗畵)보다도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尙南貶北論)을 주창하였다. 그림은 동원(董源)‚ 거연(巨然)을 스승으로 모셨고 송(宋) ·원(元)의 화가들의 장점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심석전(沈石田) ·문징명(文徵明) 등의 오파문인화(吳?文人畵)의 남종화풍을 계승 발전시켜 근거를 원나라의 황공망(黃公望)에게서 찾았다. 스스로 고아수윤(古雅秀潤)이라고 부르던 화풍으로‚ 먹물 빛깔의 변화가 풍부하고 간명한 산수화를 많이 남겨 창작과 실제화업(實際畵業)을 화론(畵論)과 병행하여 전개하였다. 문학에도 능통하였고‚ 서가로서도 명대 제일이라고 불리며 형동(邢 愼 )과 어깨를 겨루어‚ 북형남동(北邢南董)이라 불린다. 서체는 왕희지(?羲之)를 주종으로 삼으면서도 글씨 체형보다 내용을 더 추구하여 당시 제일의 문인으로 각 방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다. 저서로 《산수화책(山水畵 刪 )》 《용태집(容台集)》 등이 있다. 유용(劉墉)은 중국 청(?)나라 때의 정치가이며 서예가이다. 자는 숭여(崇?)‚ 호는 석암(石庵)이고 산둥성[山東省] 출신으로 동각대학사(東閣?學士)를 지낸 유통훈(劉統勳)의 장남이다. 33세 때인 1751년 진사에 급제하여‚ 다음해 한림원(翰林院) 학사로 들어갔으며‚ 그 후 태자대보‚ 체인각대학사(體仁閣?學士)를 거쳐 재상까지 역임하였다. 경(經)·사(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두루 통하고 시문(詩文)을 잘하였으며 특히 서법(書法)에 능하였다. 처음에는 가풍을 이어 조자앙(趙子昻)의 송설체(松雪體)를 배웠으나 후에 소식(蘇軾)‚ 동기창(董其昌)의 서체에 빠졌고‚ 말년에는 북조(北朝)의 금석문(金石文)에 심취하였다. 특히 소해(小楷)와 행서(行書)‚ 초서(草書)에 뛰어났으며‚ 풍려한 기골(氣骨)과 고상한 정취를 가진 독특한 서풍으로 유명했다. 진한 먹을 즐겨 사용하여 중후함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농묵재상(濃墨宰相)이라는 칭호를 들었으며 첩학파(帖學?)의 대성자로 존경을 받았다. 문집으로는 《유문청공유집(劉文?公遺集)》과 《응제시집(應制詩集)》이 있으며‚ 특히 논서칠절(論書七絶)의 《학서우성(學書偶成‚ 30수)》과 서첩《청애당첩》이 널리 알려져 있다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emuseum.go.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원문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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