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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사 (直指寺 ‚ Jikjisa Temp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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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물명
직지사 (直指寺 ‚ Jikjisa Temple )
저작(권)자
저작자 미상 (저작물 2267374 건)
출처
이용조건
KOGL 출처표시,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새창열림)
공표년도
창작년도
2015-05-29
분류(장르)
사진
요약정보
< 개요 >
본사(本寺)의 초창(草創)은 신라 눌지왕(訥祗?) 2년(418) 아도 화상(阿道和尙)에 의하여 도리사(桃李寺)와 함께 개창(開創)되었다. 그 사명(寺名)을 직지(直指)라 함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成佛)이라는 선종(禪宗)의 가르침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또 일설에는 창건주(創建主) 아도 화상이 일선군(一善郡‚ 善山) 냉산(冷山)에 도리사를 건립하고 멀리 김천의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전설(傳說)도 있다. 또는 고려의 능여 화상이 직지사를 중창할 때 자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지(測地)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이는 모두 창건설화와 연관된 직지(直指)의 미화(美化)된 전설에서 유래되고 있지만‚ 실은 불교 본연의 직지인심(直指人心)을 상징하는 의미로 풀이 될 수 있다. 즉 창건 설화의 직지(直指)와 선가(禪家)의 직지(直指)가 둘이 아니라고 볼 때‚ 이는 곧 불교의 본질을 나타내는 이름이라 하겠으며‚ 또한 사명 (寺名)에 불교의 본지(本旨)를 이처럼 극명(克明)하게 나타내는 사찰도 흔치 않으리라 본다.
아도 화상에 의하여 개창된 직지사는 신라시대에 2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그 첫째는 선덕여왕(善德女?) 14년(645) 자장 법사(慈藏法師)에 의한 중수를 들 수 있고‚ 두번째는 경순왕(敬順?) 4년(930) 천묵 대사 (?默?師)에 의한 2차 중수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직지사는 제 2대 정종 원년(定宗元年‚ 1339) 정종의 어태(御胎)를 절의 북봉(北峰)에 봉안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고‚ 이로 인하여 조선시대에도 줄곧 사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 대사(四溟?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 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직지사의 사세가 가장 흥성했던 시기에는 현재 김천시내 법원이 있는곳을 비롯하여 구화사(九華寺)까지가 직지사의 사유지였으며‚뿐만 아니라 상주 통로 우시장(牛市場) 근처의 다리이름이 직지교(直指橋)였고‚ 그 상류(上?)는 모두 직지사의 영유(領有)였다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직지사는 일제시대(日帝時代)사찰령(寺刹令)이 제정되면서 한때 해인사(涇印寺)의 말사(末寺)로 전락하기도 하였으나‚ 광복 이후 50년대에 본산제도(本山制度)가 재편성되면서 본산(本山)으로 승격되어 그 사세를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관할 구역은 4개시(個市)‚ 1개군(個郡)으로 김천‚ 구미‚ 상주‚ 문경시와 예천군이다. 또한 본사의 산림(山林)은 약 600정보(町步)에 달하며‚ 사찰 경내 면적만도 약 30‚000평에 이른다. 그리고 본사에 소속된 말사 역시 수많은 성보문화재(聖寶文化財)와 고적을 지니고 있다.
이렇게 본사는 역대의 중건(重建)‚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천 수백년 법등(法燈)을 이어 오다가 최근(最近) 반세기 동안 창사 이래(創寺以來) 최대의 불사를 일으키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으니 이는 오로지 1958년 본사의 주지로 부임한 녹원 화상(綠園和尙)에 의한 중흥불사(中興佛事)의 공덕에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먼저 사찰 주변의 정화(?化)를 위하여 사유대지(私有垈地) 10‚088평과 전답 12‚627평‚ 그리고 임야 3‚740평을 매입하였다.
이와 함께 사적기(事蹟記)에 따라 모든 불전(佛殿)과 당우(堂宇)를 중건‚중수함은 물론 국제회의와 대법회를 위한 본사 최대의 건물인 만덕전(萬德殿)을 건립하는 한편 4기(基)의 신라시대 고탑(故塔)을 이건(移建)하였으니 이는 창건 이래 최대의 불사(佛事)이며 일대변혁(一?變革)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기타정보
저작물 파일 유형
저작물 속성
1 차 저작물
공동저작자
1유형
수집연계 URL
http://www.kcti.re.kr
분류(장르)
사진
원문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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